아이 같은 마음과 거장의 손, 피아니스트의 목소리
네 번의 인터뷰와 서른네 편의 단상들로 정리한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삶, 우정과 사랑, 그리고 음악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여성이 많지 않은 클래식 음악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피아니스트다. 1957년 열여섯 살의 나이에 부조니 콩쿠르와 제네바 콩쿠르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그녀는, 연주 슬럼프와 무대공포증, 암 투병을 이겨내고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아르헤리치의 말』은 2004~2019년 사이에 진행된 네 번의 인터뷰와 아르헤리치의 구술을 정리한 서른네 편의 단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인터뷰를 진행한 프랑스의 음악 저널리스트 올리비에 벨라미는 아르헤리치의 첫 공식 평전을 쓴 작가이다. 그런 만큼 『아르헤리치의 말』에서도 친숙한 분위기 속에 깊은 속내를 끌어내 들려준다. 아르헤리치의 말과 글을 따라 읽다 보면 그녀와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책에서 마주하는 아르헤리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보다는 피아노를 잘 치는 보통 사람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소탈하다. 그녀는 피아노를 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거나 피아니스트로서 사는 게 재미없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모든 말에는 피아노와 음악이 빠지지 않는다. 소소한 일화나 농담을 건네다가도 음악과 예술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던진다. 가벼움과 무거움, 삶과 예술을 오가는 그녀의 이야기는 아름다움, 우정과 사랑, 나이 듦에 대한 사유를 유도한다.

 

음악이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아요. 루틴에 빠질 수도 있어요. 자기 모방을 추구할 수도 있고요. 자기 모방은 유혹적이죠. 특히 일전의 연주가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면 그때처럼 하고 싶게 마련이에요. 하지만 매일 다시 시작되는 하루도 그날그날이 다르잖아요!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다면 뭐 하러 살아요! 무슨 의미가 있어요?
_54~55쪽

 

 

“나는 삶을 부딪치면서 발견하고 싶었어요”
삶으로 연주하고 음악처럼 사는 피아니스트

 

처음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세 살 무렵부터 신동이라 불린 아르헤리치는, 열성적인 어머니 밑에서 피아노가 인생의 전부인 청소년기를 보낸다. 하지만 “삶에 욕심이 있는” 그녀는 피아노에 삶을 헌납하지 않는다. 대신 피아노를 경유하여 삶의 폭을 넓힌다. 사람됨의 품을 키움으로써 피아노를 삶에 통합시킨다.
아르헤리치는 음악의 천재인 동시에 우정의 마에스트로다. 십대 시절 빈에서 만난 브라질 출신 피아니스트 넬손 프레이레와 나눈 평생의 우정은 그녀의 삶을 지탱한다. 세계적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레너드 번스타인, 바이올리니스트 이브리 기틀리스 등과 나눈 우정도 책에 담겨 있다. 대화하기를 좋아하는 그녀의 집은 음악가들이 모이는 아지트이다. 동료들과 구축한 관계망을 통해 그녀는 피아노에 매몰되지 않고 삶으로 나아간다.
아르헤리치는 연주 활동을 하다 만난 지휘자 샤를 뒤투아, 피아니스트 스티븐 코바세비치와 사랑을 하기도 한다. “내 인생에서는 우정이 사랑보다 중요했다”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사랑은 우정에 속한 감정이다. 그녀는 두 사람과 헤어진 뒤에도 친구로 남아 여전히 함께 무대 위에 오른다. 

 

두 대의 피아노에서 우리는 우리인 동시에 또 다른 한 사람이죠. 서로를 느끼고 서로의 소리를 들어요. 서로 보완도 하고. 그런 게 실내악에서는 특히 재미있어요. 한 사람이 좀 약해지면 다른 사람이 받쳐주고. 어떨 때는 반대로, 누군가가 막 나가면 다른 사람까지 전염이 되어 막 나가죠. 정말 재미있어요. 그런 게 진정한 교류, 일종의 대화…… 아니, 대화 이상이죠. 
_56쪽

 

아르헤리치는 바흐, 슈만, 베토벤 같은 위대한 작곡가와 쇼팽, 리스트 같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애정도 빼놓지 않는다. 악보라는 매개로 그들과 오래 대화를 나눠서인지, 그녀의 시선 속에서 앞서간 거장들은 보다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음악을 통해 맺은 우정과 사랑으로 삶의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그 에너지를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나는 좀 재미있지만 너무 우스꽝스럽지는 않은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이 듦이 선사하는 자유로움이라는 선물

 

아르헤리치 하면 두 가지 얼굴이 떠오른다. 하나는 불안을 감추려는 듯 턱을 높이 치켜든 젊은 시절의 아르헤리치다. 다른 하나는 풍성한 잿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편안한 미소를 짓는 노년의 아르헤리치다. 『아르헤리치의 말』에는 젊은 시절의 불안했던 아르헤리치가 노년의 여유로운 아르헤리치로 성장해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르헤리치는 1980년대 중반부터 독주 대신 실내악 협연에 집중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녀는 “외로워서”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 잘 다니지 못하고 피아노만 쳤던 기억이 남아서인지, 아르헤리치는 사람들과 함께 무대 위에 오르는 것을 선호한다. 다른 사람의 재능을 발견하기 좋아하는 그녀는 루가노 페스티벌과 벳푸 아르헤리치 페스티벌 등을 조직해 젊은 음악가들에게 연주 기회를 주기도 한다.
연주 레퍼토리를 정할 때 그녀가 우선시하는 기준은 연주자로서의 커리어가 아니라 그 순간의 마음이다. 그녀는 원하는 무대에서 원하는 곡을 연주함으로써 음악의 즐거움을 잃지 않고 꾸준히 활동을 이어간다. 또한 그녀에게 “삶의 의미는 발견”에 있다. 수차례 연주했던 악보에서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배운다고 말하는 그녀는, 나이 듦이 주는 자유로움의 힘으로 변화와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그녀에게 나이 듦은 곧 선물이다. 잘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가 있다면, 아르헤리치의 이러한 태도는 자유와 여유를 느끼게 해줄 것이다. 

 

예전보다 낫다는 말을 곧잘 들어요……. 정말 다행이지요. 어쩌면 좀 더 풍부해지긴 했는지도……. 어쨌든 예전과는 달라요. 내가 옛날에 녹음한 음반을 들으면 뭔가 좀…… ‘신랄한’ 느낌이 들어요. 지금은 더 둥글둥글하고 감싸는 느낌이죠.
_118쪽

 

아르헤리치에게 음악과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녀의 음악에는 삶이 담겨 있고, 그녀의 삶에는 음악이 흐른다. 아르헤리치의 음악을 사랑하는 팬이라면 『아르헤리치의 말』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것이고, 아르헤리치를 아직 잘 모른다면 이 책을 통해 위대한 음악가 한 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경우든 상관없이 그녀와의 대화는 생의 에너지로 가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