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책대로 살게 된다”

베테랑 인문편집자가 기록한 책을 둘러싼 세계


14년간 꾸준히 굵직한 인문서 목록을 쌓아온 출판사,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출판사, 좋은 책을 많이 내는 출판사. 글항아리 출판사를 수식하는 말들에는 독자들의 신뢰와 지지가 깔려 있다. 글항아리의 편집장인 저자 이은혜는 그 시작부터 고락을 함께했다. 열렬한 독서가이면서 유능한 편집자, 마침내 저자로 거듭난 그에게 책을 읽고 만들고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읽는 직업』은 편집자 이은혜가 오랜 시간 골몰해온 출판과 편집에 관한 고민, 태도를 숨김없이 진솔하게 써내려간 책으로, 풍부한 편집 경험에서 우러난 베테랑 편집자의 날카로운 시각과 깊은 통찰력이 돋보인다. 편집자의 일을 실무에 기초한 매뉴얼식으로 나열하지 않고 다양한 실제 사례를 들어가며 보여줌으로써 편집의 세계를 명료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저자는 출판을 지탱하는 ‘저자-독자-편집자’라는 트라이앵글을 중심에 놓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함께 작업해온 저자들을 향한 경외, 두꺼운 책을 외면하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소망, 편집자란 직업에 쏟는 무한한 열정이 진진하게 펼쳐진다. 가끔은 융통성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정공법을 따르는 이상적인 편집자의 태도와 철학은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직업으로서의 편집자’는 누구인가, ‘출판의 생태계’는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사실 많은 독자는 책을 ‘재미’로 본다. 나 역시 재미로 책을 읽는데, 다만 그 재미의 종류가 서로 달라서 어떤 이들은 내가 읽는 책이 ‘정말 재미없어 보인다’고 말하기도 한다. 여하튼 재미로 읽기 시작한 책이 밥벌이가 된 저자와 편집자, 그리고 재미로 글을 읽다가 언젠가 그 자신도 글을 쓰게 될 독자들까지 포함해 책 읽는 이들이 거의 책대로 살게 되는 일을 많이 목격했으면 한다.

─9~10쪽


출판계는 저자-편집자-독자라는 트라이앵글로 ‘계界’를 지탱하고 있다. 저자는 기존 작가들의 글을 수없이 읽으면서 자신도 그들처럼 글을 써 먹고살 길을 찾겠다고 결심한다. 편집자는 누구보다 글을 좋아하고 책을 많이 읽어왔으니 책 주변에 머물며 먹고살겠다고 결심한다. 독자 역시 책 주변을 맴돈다. 한 번 책을 읽은 독자는 계속 책에 빠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책을 읽는 이와 읽지 않는 이로 나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148쪽



“한 명의 저자는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

자신을 투신해 글을 써내는 경이로운 사람들


투고 원고를 살펴보는 것은 편집자의 중요한 일과 중 하나다. 편집자의 메일함에는 하루에도 수십 통의 투고가 쏟아진다. 원고를 보내오는 이들은 편집자가 누구인지, 그의 관심 분야는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염원을 담아 저자가 되기를 꿈꾼다. 그러나 수많은 원고 중 책이 되는 것은 극소수다. 편집자는 저자를 향한 애정과 글에 대한 취향 그리고 손익 계산 등을 종합해 사업가의 마음으로 원고를 취사선택한다. 다시 말해, 아무리 글이 좋고 기획이 우수하다 할지라도 메일함과 서랍에 방치되는 원고가 셀 수 없이 많다. 저자는 ‘국내 현실과의 접점이 없어서’ ‘너무 전문적이거나 너무 개인적이어서’ ‘글이 어려워서’ 같은, 일견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들로 줄줄이 퇴짜를 놓아야만 하는 편집자의 고충을 토로한다.

이와 반대로 읽는 순간 글쓴이의 자장 안으로 편집자를 끌어당겨 사랑에 빠트리는 강렬한 원고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하고 있던 모든 일을 제쳐놓게 할 만큼 뛰어”난 글을 쓰는 저자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편집자의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한번 사랑에 빠진 편집자는 저자가 열어준 세계로 들어가 유영하고, 그 세계는 곧장 또 다른 세계로 편집자를 안내한다. 편집자 이은혜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만들면서 ‘불평등’이라는 주제에 압도되었고, 이후 거시적 문제에서 내려와 지속적으로 우리 곁의 작고 연약한 존재들에게 시선을 보내며 불평등 문제에 천착해왔다. 그 결과, 글항아리의 한 축인 불평등 관련 도서란 큰 줄기를 만들 수 있었다.


지칠 줄 모르고 누군가를 또다시 좋아하게 되는 것이 편집자의 특성이다. 왜냐하면 글로써 사람을 먼저 접하는 우리는 서로의 신상부터 파악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곧바로 정체성(글)의 핵심으로 파고들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아하게 되는 속도도 빠르고 관계의 밀도도 높으며, 헤어지면 그만큼 커다란 내상을 입는다. 

─24쪽


비밀은 글을 쓰게 한다. 그러므로 진짜 비밀은 없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비밀과 달리 글로 쓰인 비밀은 울음과 비탄을 마침내 정돈해서 담아내는 까닭에 희망을 향해 달린다. 수많은 사람이 오늘도 출판사로 원고를 보내온다. 그것들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카이브로 축적되어 거대한 강물을 이룬다. 강물은 때로는 핏빛이다. 하지만 다른 물줄기와 섞이고 모여들면서 하나의 역사를 기록한다. 책으로 출판되기도 하고, 혹은 출판되지 못한 채 출판사 메일에만 흔적을 남긴다. 제 운명을 어느 이름 모를 편집자의 손에 내맡긴 채.

─68쪽



“편집자는 책을 만들기 위해 삶의 방식도 바꾼다”

책 만드는 사람의 관찰과 기억


편집자는 자신이 만든 책을 얼마간 따라가고, 책은 만드는 편집자를 반영한다. 주제나 내용뿐만이 아니라 교정하는 습관부터 목차를 구성하는 방식까지 책에는 편집자의 취향이 구석구석 스며든다. 그렇다면 원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장악하기 위해 편집자는 무엇을 할까. 이 책의 저자는 편집 과정 중 무엇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수많은 참고도서를 읽는 것은 물론, 때로는 활자 밖으로 나가 지방 곳곳을 답사하고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모으기도 한다. 그러나 독자는 책에 들어간 시간과 공력을 알기 힘들고, 대개 오탈자를 통해 편집자의 존재를 인식한다. 저자 이은혜는 몇 달간 책에 매달려도 기어코 발생하는 오탈자로 인해 껴안게 되는 오욕을, 성찰하는 마음을 담아 털어놓는다.

한편, 베스트셀러가 나오면 그 즉시 모방이 시작되고 비슷한 표지와 내용의 책들을 연이어 내놓는 출판 시장에 대한 아쉬움도 지적한다. 트렌드 싸움은 곧 속도전이므로 편집자는 주제와 구성보다 외형에 치중하게 된다. 저자는 결국 책의 완성도가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왜 출판사와 편집자가 계속해서 서로를 모방할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하며, “모험과 실험보다는 안정과 확신에 올라”탄 편집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샅샅이 들여다본다.


편집은 효율성과는 담을 쌓은 분야이고, 원고를 음미하면서 자기 감상을 끼적거릴 여유는 없다. 근원이 되는 자료를 찾아 연어처럼 헤엄쳐야 하고, 내가 틀렸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24시간 마음속에 담아둬야 한다(혹은 나만큼 정확한 사람은 없다는 자부심까지도).

─104쪽


(…) 요즘 편집자들은 옛 시절의 편집자들과 달리 자기 정체성의 30퍼센트쯤은 마케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알리고 팔아야 한다’, 이게 그들의 모토지만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본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므로 남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은 곧 모방으로 이어진다.

─151쪽



“독자는 매일 다만 얼마큼이라도 성장한다”

뒤돌아보지 않고 끝끝내 이어지는 독서


과거 발언할 매체가 없어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존재였던 독자는 이제 수많은 발언의 장場을 활용해 다채로운 의견을 표명한다. 적극적으로 출판 생태계의 일원임을 표출하는 독자 덕에 출판은 자성하며 더욱 단단하게 내실을 키울 수 있다. 그러나 종종 책을 읽지 않고 인터넷 서점에 올라와 있는 목차나 책 소개만 훑어본 후, 한두 개의 별과 함께 악평을 남기는 “나쁜 독자”도 있다. 저자는 새로운 독자군의 등장으로 편집자의 멘털 관리가 중요해졌음을 강조하고, 같은 이유로 편집자는 다른 편집자가 만든 책을 섣불리 평가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아가 편집자로서 천 권밖에 팔리지 않는 책들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글항아리에는 가치 있고 유의미하지만 독자의 간택을 받기 힘든 책, 그중에서도 소위 ‘벽돌책’이라고 불리는 두꺼운 책이 꽤 있다. 두께가 장벽이 되거나 시류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단 천 명의 손에만 쥐어진 채 명을 다하는 책들이다. 저자는 “딱 천 마리의 학만 접어 선물한 듯한 기분”이라는 말로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더 많은 독자가 깊고 넓은 인문서의 세계에 합류하기를 당부한다.


편집자는 독자를 대표해 원고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막중한 역할을 맡는다. 사실 편집자는 독자를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최근 몇 년 사이의 판매 추이로 독자를 더듬어 짐작할 뿐이다. 여하튼 저자와 역자는 우선 편집자를 설득하려 하고, 편집자는 독자를 상상하며 그들의 욕구를 측정하려 한다.

─53쪽


(…) 이 책들을 쓴 이들이 마련해준 렌즈는 무경험자들이 경험자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최대치의 이야기를 보여줄 것이다. 이들 모두 21세기를 어느 정도 예언하며 경고하는 절박한 목소리인데, 딱 1000명의 독자만 빼고는 이들 증언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이런 책을 만들고 나면 딱 천 마리의 학만 접어 선물한 듯한 기분이 든다. 학을 더 이상 접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안타까운 것은 물론이다.

─19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