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 특별판

‘경쾌한 에디션’으로 만나는 수전 손택과 박완서의 말 

 

지난해 가을 손보미 소설가의 짧은소설『맨해튼의 반딧불이』 ‘경쾌한 에디션’ 발간을 시작으로 2020년 봄, 마음산책은 또 다른 경쾌한 에디션 두 권을 들고 찾아왔다. 하드커버와 흑백무선, 두 가지 에디션을 동시 출간한 지난번 실험이 한 권의 책을 두 가지 물성으로 동시에 느껴보는 계기를 마련했다면, 이번 실험은 3ㆍ8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여성주의라는 렌즈로 독자들에게 새로운 말 걸기를 시도하고자 한다. 

올해 경쾌한 에디션으로 선별한 책은 마음산책 ‘말 시리즈’ 가운데 특별히 많은 사랑을 받아온 『수전 손택의 말』과 『박완서의 말』이다. 마음산책 ‘말 시리즈’는 ‘말에 지성이 실린 책’을 표방하며 인물들이 남긴 기록, 대담, 인터뷰 등 다양한 형식으로 표현된 말을 매개로 거장들의 생각과 철학을 소개해왔다. 흥미롭게도 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 수전 손택이었고, 처음으로 소개한 국내 작가가 박완서였다는 점은 다양한 지성들 가운데 여성 인물에 남달리 주목해온 마음산책의 뜻이 자리한다. 

하지만 마음산책이 손택과 박완서의 말을 환기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이들이 성차별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학계와 예술계, 문단에서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만은 아니다. 두 지성이 특별한 것은 이들이 글쓰기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바탕으로 새로운 언어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여성이 자신의 언어를 갖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시절, 손택과 박완서는 현실을 글로 묘사하고 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인식을 개척해온 것이다. 경쾌한 에디션『수전 손택의 말』과『박완서의 말』은 성평등을 향한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높은 지금, 여성들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자리와 언어를 고민하게 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다.

 

 

글 쓰는 여자는 질문한다

수전 손택의 젠더 스테레오 타입에 대한 도전    

 

『수전 손택의 말』에는 1978년 <롤링스톤>과 한 인터뷰가 오롯이 담겼는데 문학, 영화, 음악, 성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작가의 말에는 여지없이 그만의 지성이 배어난다. 특유의 통찰력 가득한 글을 통해 그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 “뉴욕 지성계의 여왕”으로 칭송받았지만 실상 그 청춘은 극적 사건으로 가득했다.『다시, 태어나다』에 내밀하게 드러나듯 젊은 시절의 출산, 유럽 유학 시절 성 정체성의 자각과 두 연인들과의 애증의 관계, 이성애나 결혼 제도를 향한 감정의 격랑 등이 그것이다.『수전 손택의 말』에서 작가는 그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성적 자유의 주체인 여성을 단죄하는 사회적 편견에 대한 비판과, 젠더 질서를 포함한 모든 전형적인 범주에 도전하는 시각을 드러낸다. 즉 그 누구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늙었다는 이유로 주눅 들거나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이는 손택이 남성/여성이나 젊음/늙음처럼 인간을 스테레오 타입화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가능성을 제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한편 대단한 탐독가이기도 했던 수전 손택이 당대 페미니스트들의 저작을 평하는 대목도 빛난다. 작가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 대해 일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이를 “늙음을 문화적 현상으로서 진지하게 다룬” 최초의 저서로 평한다. 또한 엘렌 식수 등 프랑스 정신분석학 페미니스트들이 주창한 ‘여성적 글쓰기’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물학적 본질주의로 환원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수전 손택의 말』은 고고하게만 비춰진 손택의 다채로운 내면을 소개하면서도 자유를 꿈꾸는 오늘날의 여성주의자들에게 영원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 “나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사유를 하는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여성 문제를 소설화 하는 것은 당연한 일” 

박완서가 들려주는 여성, 문학, 삶

 

최근 미투 운동 이후 남성 중심적 질서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그 대안으로 여성 서사가 주목받고 있으며, 이 흐름을 주도하는 작가들 중 다수가 1980년 이후 생으로서 박완서 문학을 읽으며 성장기를 보냈다. 즉 부상하는 여성 작가들의 문학적 수원(水原) 일부는 박완서에게 있는 것인데, 마흔에 소설가로 데뷔하여 40년간 창작활동을 통해 여성 문제를 조명해온 박완서의 생애와 작품은 이들에게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기에 충분하다. 실상 여성운동이 대중화되거나 페미니즘 문학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시절에도, 작가 스스로 여성 문제를 소설화 하는 것의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던 만큼 그 목소리는 단정한 통찰로 빛난다. 

『박완서의 말』은 소설가 박완서의 이력이 절정에 다다른 1990년부터 1998년까지 모두 일곱 편의 대담을 담았으며, 이 대담들이 단행본으로 엮인 것은 처음이다. 인터뷰에는 딸이 신여성이 되기를 바란 어머니와 시작한 서울 생활, 전쟁으로 멈춘 대학 생활, 어머니로 살아가는 것의 모순 등 그의 삶을 채워온 크고 작은 개인사가 토로되는데, 이는 박완서 개인의 삶이자 보편적 한국 여성의 그것이기도 하다. 또한 가족, 교육, 가난과 계층, 그리고 남성의 삶과 여성의 삶 등 

작가는 지금도 유효한 주제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날 서지 않은 편안한 음성으로 들려준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서사에 가려진 여성들의 삶을 문학이라는 공간에 생생하게 살려내기까지,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의 무게가 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