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사람들의 얼굴에서 발견한 내 마음의 풍경, 본지풍광 本地風光


자신의 모습 중에서 쉽사리 보기 힘든 태(態)는 뒷모습이지만 가장 간과되는 쪽은 옆모습이다. 쉽게 눈에 띄는 정면의 상(象)이라 해도 다르지 않다. 현대인의 거울에 얼비춰진 모습은 세상에 대항해 쓴 방패 같은 무표정일 뿐, 이제는 그나마도 본모습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가면과의 친밀한 동거로 어느덧 본얼굴을 망각해버렸다면 타인의 윤곽을 더듬어 자신의 본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때로 필요하다. 『차를 반쯤 마셔도 향은 처음 그대로』는 오지의 사람들에게서 우물물처럼 길어온 순수하고 가감 없는 담백한 모습을 통해 자아를 비춰 들여다보는 명상여행 사진집이다.



그림과 글의 화답 - 사진의 원리는 더하기가 아닌 빼기


『차를 반쯤 마셔도 향은 처음 그대로』에 실린 85컷의 사진은 지구촌의 순도 높은 지역 구석구석에서 채취한 청정함의 표본이다. 유인걸 사진작가는 지난 1996년부터 세계 10여 개국(네팔, 라오스, 멕시코, 모로코, 미얀마, 베트남, 부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인도네시아, 중국, 탄자니아, 티베트, 파키스탄)을 여행하면서 삼각대를 설치할 겨를도 없이 셔터를 누르게 만들었던 무수한 찰나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서로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사진작가의 심정을 그대로 포획한 김홍근 작가의 글은 평소 그 뜻을 나눈 지인답게 의미가 풍부하고 깊이 있다.


유인걸 선생의 사진은 매우 직설적이다. 군더더기가 없이 대상을 적확하게 포착하여 드러낸다. 스트레이트 사진이랄까? 그런 사진이 나의 삶의 방식과도 잘 맞아, 텍스트를 덧붙이게 되었다.


사진의 원리는 글 쓰는 원리와 같고, 그대로 삶의 원리와도 같다.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다. 가급적 인위적 의식의 개입을 절제하고 무아의 상태에 있으면, 텅 빈 공간에 존재의 빛이 가득 차게 된다. 반쯤 마신 차라도 향은 처음과 같은 것처럼, 누구에게나 깃든 초심의 향을 맡아본 사람은 지혜롭게 자신을 믿고 맡긴다. 이 책의 사진과 글은 그렇게 나온 것이다.

- 작가의 말


김홍근 작가는 문화유적답사 여행에서 체험한 ‘소박한 마음의 행로’를 담은 전작 『선화』에서 ‘아는 만큼 보이’기보다는 ‘느낀 만큼 보이’는 글쓰기를 선보였다. 이번 책에서는 피사체를 ‘나’와 분리하지 않고 마음의 파장으로 사진을 읽고 해석해, 인물에 대한 작가적 감수성을 확인할 수 있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타국 사람들의 눈에서 감성적 교차점을 끌어내 그 마음속을 투시한다. 미얀마의 탁발 비구니에게서는 그녀의 몸에 붙은 거죽만큼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속마음을 추려냈다(37p). 시원스레 등목을 하는 미얀마의 젊은 스님에게서는 그 속박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반복되는 번민과 갈등의 낌새를 채고 이를 다독인다. 중량감 없이 도식적으로 연결된 댓글이 아니어서, 아날로그 사진의 깊이만큼 음미할 구석을 남긴다.


찬물을 끼얹는다고 젊은 육체에 불타오르는 번뇌의 불이 꺼질까? 아름다운 몸일수록, 번뇌의 불은 드센 법. 마당의 풀을 뽑다보니 청년의 방 앞엔 풀도 많더라. 노인의 방 앞엔 풀도 적더라. 고개 들어 언덕을 보니, 거기는 풀투성이인데 뽑고 싶기는커녕 보기 좋기만 하다. 마당과 야산만 구별하지 않으면, 풀 없는 것도 상관 않고 풀 있는 것도 상관 않을 텐데. (47p)



순수함의 자연치유력 - 지상은 마음을 찾아 순례하는 우리들의 거룩한 성지


“인생은 낯선 들판에서의 하룻밤”, 그렇기에 낯선 풍경 속 사람들의 모습은 희미하나마 자신의 희로애락과 겹쳐 보인다. 작가는 수레 위에서 선잠을 청한 어느 아프가니스탄 청년의 축 늘어진 어깨에서 전쟁을 치른 상이용사의 고단함과 열패감을 읽어낸다.


잠자리가 없어 한데를 다니다가, 겨우 수레 위에 누웠다. 춥고 긴 밤. 가녀린 새벽볕이라도 쬐러 일어나 앉았다. 전쟁터에선 용감히 싸웠는데 그를 맞는 사회는 차갑기 그지없다. 보기 싫은 흉터를 양말로 가린 채, 삶을 이렇게 흘려보내야만 할 것인가.


어쩌면 이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 패잔병 아닌 사람이 있을까? 상처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만은 늘 승자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 이 점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외로운 사람들끼리 손을 잡을 수 있다. 저 상이용사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33p)

작가는 힘겨워하며 땔감을 나르는 부탄의 노인네를 보며 삶의 무게에 함께 휘청거리기도 한다(38p). 인도의 어느 초라한 행상과 눈맞춤한 후에는 자신이 벌이고 있는 인생이라는 행상을 돌아보며 쓴입맛을 다신다(60p). 파키스탄에서 만난 한 떼의 양치기 무리는 순수를 상징하는 고대의 상형문자인 양, 무언의 위로를 전하며 천천히 마른 호수 바닥을 가로지른다(90p). 굴렁쇠와 나무로 깎아 만든 가짜 자전거를 타고 놀면서도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는 듯이 즐거워하는 탄자니아의 아이들이 보내는 환한 웃음의 메시지는 유독 하얗게 빛나는 가지런한 치열만큼이나 반듯하다(109p). 티베트의 어느 이층 가옥, 창틀에 나란히 붙어 있는 화분, 고양이, 소년의 구도는 지구와 자연이라는 생명의 연대와 우연히 마주친 듯한 귀중한 느낌을 선사하기도 한다(174p).



초심初心의 처녀성을 찾아서 - 누구에게나 고이 간직된 첫마음이 있다


번잡한 마음을 비우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영역이 있다. 『차를 반쯤 마셔도 향은 처음 그대로』는 그 마음을 찾아가는 여행기이자 자신의 본모습을 돌아보는 명상의 기록이다. 김홍근 작가는 한 장면, 한 장면을 곰곰이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현대인의 가면 속에 깊숙이 감춰져 있는 순수 자아를 발견한다. 그가 발견한 초심은 “내 존재의 충실한 바닥이 되어주는 마음”이다(97p). 요란스럽게 화장을 덧칠하는 것이 아니라(135p) 빈 광주리처럼 비우는 것이다.


빈 광주리는 자유롭다. 뭐든지 담을 수 있다. 뭘 담을 필요가 없을 땐 그냥 빈 몸으로 있는다. 담을 땐 담고 빌 땐 비므로, 있고 없고에 상관하지 않는다. 평시엔 비어 있으므로 뭐든지 즉각 담을 수가 있다. 수많은 물건이 광주리를 거쳐 갔다. 하지만 전혀 흔적이 없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돌고 도는 세상 속에서 광주리는 유유자적하다. 비어 있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다. (99p)


그는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같은 의식의 영역을 말끔히 한다면 누구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전인미답의 청결한 자아, 초심을 만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 마음의 구획을 벗어나 시원스레 뻥 뚫린 무릉도원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청결감과 낙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안에도 평원이 있고, 협곡이 있다. 선입견, 고정관념 등은 협곡이다. 골이 깊을수록, 우리는 꼼짝 못한다. 그러나 그런 의식을 걷어내면, 대평원이 펼쳐진다.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의식의 벽, 그것이 곧 나를 가두는 장애인 것이다. 거치적거리는 지식의 구릉들을 밀어버리고 평원을 맘껏 달리고 싶다. (115p)



다반향초茶半香初 -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절반인데 향은 처음 그대로


평소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다종교적 연구에 흥미를 가져온 김홍근 작가의 글은 명상과 성찰, 그리고 선현들의 명언에 맞닿아 있다. 이 책의 제목은 평소 추사 김정희 선생이 즐겼던 중국시 ‘다선송(茶禪頌)’의 시구에서 인용했다. 한 잔의 차를 비울 때까지 변치 않는 차의 향처럼, 우리 안에 간직되어 있을 초심을 떠올리면서…….


정좌처다반향초(靜座處茶半香初)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절반인데 향은 처음 그대로다.

묘용시수류화개(妙用時水流花開) 묘하게 쓰는 때에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모래사막을 건너는 유목민과 낙타, 빨랫줄도 없이 볕에 널어놓은 알록달록한 빨랫감,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 마을축제로 향하는 색동옷의 처녀……. 이런 풍경에서 청량감을 느끼는 이유, 이 여행에 동참하게 되는 이유는 본연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갈증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