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에서 일상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삶인가 ─『환속』이 나오기까지


『환속』은 한때 입었던 성직의 옷을 벗고 평범한 일상인으로 돌아온 비구스님, 수녀님, 비구니스님, 신부님 그리고 수사님이셨던 다섯 분의 이야기이다. 저자 김나미 씨가 1999년부터 5년간 취재해 90분짜리 테이프 36개에 수록한 열 분 가운데 다섯 분의 이야기를 포장없이 옮겨 담았다.


김나미 씨는 어렸을 때는 성당에 다녔었고, 이후 송광사에 들른 것을 계기로 불교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전국을 떠돌며 고승과 절을 찾아다니기도 했던 김나미 씨는 한때 주위로부터 출가를 권유받기도 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해 저자는 종교인들 뿐 아니라 성직에서 물러난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하지만 취재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환속’한 이들 대부분이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숨어 사는 데다가 여러 가지 민감한 사정으로 인해 자신의 사연을 밝히기를 꺼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에 수록된 다섯 분들의 이야기도 거듭 허락을 구한 후, 일부 지명과 이름을 가명으로 쓴다는 조건 아래 어렵게 소개할 수 있었다. 또 다섯 분 중 세 분은 사진촬영을 극구 사양해 두 분의 실물 사진만을 수록할 수 있었다.


‘환속’은 성직의 길을 택할 때만큼 많은 고뇌를 필요로 하는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쓴 김나미 씨는 ‘환속’을 결코 중도하차나 성직 인생의 낙오로 바라보지 않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삶의 길을 모색하는 것처럼 진정 자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용기 있는 결정이라는 것이다.


명예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직시한 후 미련없이 승복을 벗은 정연 스님, 수녀원이 결코 환상의 도피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으로 돌아온 카타리나 수녀님, 혈육보다 더욱 진한 모정의 이끌림으로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 위해 환속한 효인 스님,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사제복을 벗은 바오로 신부님, 자신의 지병이 다른 수도자에게 폐가 될까봐 수도원을 나왔지만 평생 봉사의 길을 걸어온 스테파노 수사님, 이 다섯 분들은 비록 끝까지 한 길을 가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 이분들의 인생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기보다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한 삶인가’에 대한 여러 생각거리들을 제공해준다.


김나미 씨는 취재를 하는 도중, 그리고 글을 쓰는 도중에 ‘성과 속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라는 화두에 골몰했다고 한다. 단지 승복이나 수도복을 입었다고 해서 훌륭한 성직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며, 결혼을 하고 시장터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영성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는 믿음이 강해졌다고 한다. “가정도 작은 절 아닙니까? 지금은 이 작은 대중 공동체에 충실해야지요. 식구들이 나의 도반이 된 셈이지요.” (66p 중에서) 라는 전前 정연 스님의 말 역시 ‘어디에서’보다는 ‘어떻게’에 방점을 둔 수도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저자는 결국 ‘성과 속의 구분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안에서 자신이 믿고 따르는 분의 말씀에 충실하다면 그 사람이 바로 진정한 신앙인이자 수도자라는 것이다.



환속한 다섯 사람의 이야기


비구스님에서 컴퓨터 수리공으로 ─ 전前 정연 스님
1963년 경남 산청 근교에서 어머니의 100일 기도 정성 끝에 태어났다. 고등학교 시절 어머니를 따라갔던 작은 절에서 ‘10·27 법난’을 목격한 뒤 “다시는 이 땅의 불교가 탄압받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순수한 오기로 출가를 결심했다. 10·27법난은 1980년 신군부의 무장계엄군이 범법자와 용공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3천여 사찰에 난입하여 스님과 신도들을 강제 연행해간 사건이었다.


출가 후 사판승으로 일하기 시작한 정연 스님은 신도 수천 명이 넘는 절을 가진 주지스님이자 종사 자리를 눈앞에 둔 ‘종단의 떠오르는 별’의 위치까지 올랐다. 그러나 출가한 지 16년째 되던 해 종단회의에서 이권다툼과 분규가 일어나자 모든 것을 버리고 하산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직함과 명예에만 정신이 팔려 마음공부는 뒷전에 두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참회이자 양심선언이기도 했다.


현재는 불심 깊고 마음 착한 아내를 만나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컴퓨터 수리업으로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그는 여유가 생기면 종단의 컴퓨터를 무상으로 수리하고 인터넷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마음은 편하게,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고, 일은 열심히”라는 소박한 것이다.

수녀에서 농사꾼으로 ─ 전前 카타리나 수녀님
1954년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사람 대하기를 어려워해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외톨이로 지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먼저 수녀원에 들어간 언니를 따라 대구에 있는 베네딕도 수녀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수녀원을 안전지대 내지 도피처로 여겼던 탓에 공동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내면의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처절한 자기반성과 기도 끝에 22년간의 수도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지금은 외딴 산골 작은 흙집에 머물면서 홀로 살아가고 있다. 비록 수녀원에서 나와 살고 있지만 정결, 청빈, 순명의 서약을 계속 실천하면서 농사와 기도로 수도 생활을 대신하고 있다. ‘마실 다니고, 품앗이 하고, 밭에 나가 김도 매고, 닭 모이 주고 토끼 먹이 주고 나면 하루가 금방 가는’ 일상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절로 감사기도가 우러나오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엠마뉴엘 수녀의 『풍요로운 가난』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는 그녀는 앞으로도 자연에 감사하며 자급자족의 소박한 생활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비구스님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 전前 효인 스님
1950년 6·25가 일어난 해에 파주에서 태어났다. 1979년 석림사 주지였던 보각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동학사 강원 졸업을 끝으로 학업을 접고 복지 사업에 동참하였다. 목탁 치고 경전 읽는 것보다 세상에 직접적으로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자 마음먹고, 안양 관악사 밑 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열한 살된 딸아이와 아홉 살 된 남자아이를 만난 것이 환속의 계기가 되었다. 유달리 총명하고 구김살 없는 아이들에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아이들의 아버지를 찾아가 ‘아내가 되는 것은 싫으나 아이들의 엄마만 되게 해달라’고 몇 번이나 간청한 끝에 결국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피는 단지 빨간 물’일 뿐이라는 그녀는 아이 둘을 모두 훌륭하게 키워 분가시킨 후 현재는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식으로 공모전에 나가기 시작해서 10여 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대한민국 서예대전에 2회 입선하는 등 빛나는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는 인천의 한 서예학원에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구치소 수감자들을 위해 서예지도 봉사를 계획하고 있다.

신부에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 전前 바오로 신부님
1960년대 수색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차남으로 출생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영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아버지의 영향으로 온 가족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반항적인 청소년기를 거쳐 명문 공과대학에 입학한 후, 5공화국 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하면서 청춘시절을 보냈다. 진로를 고민하던 대학 4학년, 농촌봉사활동에서 아일랜드 출신 신부를 만나 감화받은 후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가톨릭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몇 년간 지방도시에서 보좌신부로 머무르다가 서울교구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사제의 길을 포기하게 된 것은 ‘요안나’라는 한 여신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되었다. 신앙 고민을 들어주고, 직접 영세까지 주며 가까워졌던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환속을 결심하게 되었다. 세상에 나온 후, 조그마한 슈퍼마켓을 경영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며가고자 했지만 성직자에서 일상인으로의 변화를 견딜 수 없어하던 아내와 불화가 시작되었다. 결국 아내는 그림 공부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프랑스로 떠났고, 홀로 남은 그는 편두통을 동반한 심적 고통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다. 유능한 노 한의사를 만나 치료받은 것을 계기로 한의학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한의사를 꿈꾸는 가운데 아내와의 재결합을 바라고 있다.

수사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로 - 전前 스테파노 수사님
1943년 함경남도에서 출생한 후, 한국 전쟁 당시 월남했다. 그때부터 심장과 허리에 무리가 생겨 몸의 병을 얻었고, 전후의 혼란한 세태 속에서 마음의 병을 함께 얻었다. 젊은 시절의 긴 방황 후 예수의 삶을 본보기로 살아가는 공동체인 ‘예수의 작은 형제회’에 들어가 수사가 되었지만 지병이던 허리와 심장이 악화되면서 수사직을 그만두었다. 공동체 생활을 함께하던 형제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미안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수사직을 그만둔 뒤, 1977년 용산 채소시장이 있던 자리에 노숙자를 위한 쉼터인 ‘베들레헴의 집’을 설립하였다. 아무런 교회의 배경이나 소속 없이, 매스컴의 보도 또한 일절 피한 채 13년간 묵묵히 봉사의 한 길을 걸었다.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의 철저한 실천이었다. 1990년 ‘베들레헴의 집’을 떠난 후 인사동에서 13년간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최근 허리 디스크가 악화되어 수술을 받은 뒤 강화도의 작은 한옥에서 살고 있다. 오갈 데 없는 할머니들을 모시고 살다가 조용히 ‘그분’ 곁으로 가는 것이 여생의 소원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연꽃에 앉은 물방울, 야생화, 들꽃과『채근담』, 싫어하는 것은 돈 세는 일, 좌파니 우파니 당파를 만드는 것, 그리고 전교를 목적으로 십자가를 걸고 봉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