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 피에르 신부


‘프랑스인들에게 프랑스의 정신으로 추앙되면서 국가적으로 가장 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인권운동가’인 피에르 신부는 해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하는 설문 조사에서 8년 동안 7차례나 1위에 오를 만큼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이다. 1989년에는 그의 삶을 영화로 만든 <겨울 54>가 제작되어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휴머니즘의 감동을 전했다. 그로부터 그의 사랑과 헌신, 투쟁의 삶은 전세계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는 이후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불린다.

프랑스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미래가 보장된 풍요로움을 버리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 머물기로 결정한 피에르 신부의 이력은 매우 독특하다. 1931년 열아홉의 나이에 유산을 모두 포기한 채 성직의 길을 택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이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방관할 수 없어 성직자의 몸으로 항독 레지스탕스에 들어가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정치적 힘을 통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국회위원이 되어 활동했고, 직접 가난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빈민구호 운동을 벌였다. 1949년 파리 근교의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집 없는 사람들과 부랑자, 그리고 전쟁고아들의 안식처를 마련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엠마우스 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현재 엠마우스 공동체는 전세계 44개국 350여 곳에서 활동하며 박애와 사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 노사제의 고백성사를 통해 눈물과 사랑의 기쁨을, 절망과 가난의 의미를, 신앙과 죄의 신비와 참 평화의 진리를 깊이 묵상하게 될 것이며, 마침내 인생이야말로 성경에 나오듯 ‘엠마오’라는 낯선 곳을 향해 떠나가는 나그네의 여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최인호(소설가)

그는 한 인간으로서 삶의 핵심에 대해서도 말한다.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들―자유, 행복, 사랑 그리고 희망, 이런 것을 얻기 위해 평생 어떤 노력을 해왔는가를 깊은 목소리로 전해준다. 삶의 ‘해답’이 아니라 ‘공식’을 깨닫게 해주는데, 나는 이 공식들을 내 삶에 대입해보고는 나도 잘살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들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피에르 신부를 좋아하고 신뢰하는 이유는 그가 ‘행동파’이기 때문이다.
―한비야(오지 여행가, 긴급구호활동가)



사랑·형제애·죽음에 대한 고백


『피에르 신부의 고백』은 신부의 인생 교훈이 사랑·형제애·죽음의 주제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신부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인생 활용법은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며, 그 사랑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과 하나가 되’고 ‘함께 나누고, 서로의 말에 귀기울이고, 서로를 부축하는’ 것이다. ‘하느님, 배고픈 자들에게는 빵을 주시고, 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배고픔을 주십시오’라는 신부의 기도는 배고픔의 고통을 이해할 때 온전한 사랑이 실천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은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소유당한 자일 뿐이다’라는 글귀는 의미심장하다. 이제 노년이 된 신부는 ‘인생에서 망쳐서는 안 될 본질적인 두 가지는 바로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라며 죽음을 인생의 과정이요 축복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신부에게 죽음은 ‘낯선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어머니의 편안한 뱃속을 떠나는 아기의 심정’으로 맞이하는 기나긴 여행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새길 만한 구절들


인간에게는 사랑을 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인간이 자유로운 건 사랑을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소유하는 것은 우리가 줄 수 있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소유자가 아니라 소유당한 자일 뿐이다.

홀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할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이 선택을 해야 한다. ……홀로 만족하는 사람은 사랑을 모독한다.

―<사랑> 중에서

자신이 불필요한 사람이라는 느낌은 그 무엇보다도 끔찍한 가슴 아픈 고통이다. 맹인이 된 한 친구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공동체에서 하던 일이 내 삶의 유일한 가치였는데, 이제는 눈이 없어졌으니 더 이상 나는 타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사실이 아니야. 자네에게 수프를 가져다 주는 친구에게 자네가 웃는다면 그 친구가 하루 종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셈 아닌가. 베풀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네. 자네의 기분을 베풀 수도 있으니 말일세.”

―<형제애> 중에서

20여 년 전, 한 벨기에 청년이 사회복지 공부를 마친 뒤 먼저 엠마우스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보고 싶다며 찾아왔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의 이름은 베르나르이다. 어느 여름, 엠마우스 공동체 작업장에서 그는 한 아가씨를 알게 되어 결혼했다. 그들은 모든 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후 베르나르는 갑자기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했다.


어느 날 아침 의사가 내게 말했다.

“그는 가망이 없어요. 백혈병이 빠는 속도로 악화되고 있어요. 나로서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군요.”

나는 의사에게 그 사실을 환자 부인에게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는 부인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고는 이렇게 넌지시 말했다.

“환자에겐 얘기할 필요가 없겠어요. 그냥 편안히 놓아두세요. 곧 죽음이 닥칠 텐데, 고통이 거의 없어 알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자 부인이 의사에게 한마디 쏘아주었다.

“당신이 무슨 권리로 그에게서 죽음을 훔치려 하는 거죠?

―<죽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