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까.”

밤의 시간을 넘어 햇빛 쪽으로

일상 속 얼굴들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문진영 작가의 첫 짧은 소설

 

“이 결과가 심사위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다”라는 평과 함께 2021년 김승옥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던 문진영 작가의 첫 짧은 소설집 『햇빛 마중』이 출간되었다. 『담배 한 개비의 시간』 『눈속의 겨울』 이후 세 번째 책으로 오랜 시간 세공한 짧은 소설 30편이 담겨 있다. “어둠과 햇빛을 함께 껴안고 자기 삶의 무늬를 만들 줄 아는”(임규찬, 문학평론가) 문진영의 소설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만의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이는 완벽히 겹쳐져 하나의 그림자로 보이는 실루엣에서 또 다른 존재를 인식하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다양한 빛깔로 물든 이 소설은 우리 모두를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중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한 방식으로 이상하니까. 계절은 한 사람 한 사람을 통과하며 낯설게 아름다워진다. 프리즘을 경유한 빛처럼, 경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하게 다채로운 빛깔로.”
나아가 『햇빛 마중』은 그 출발부터 남다른데, 그림을 그린 박정은 작가와의 13년이라는 오랜 우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문진영 작가의 이전 책 표지들을 모두 그린 박정은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작업을 함께했다. 문진영 작가가 글을 쓰면, 그 글을 읽은 박정은 작가가 해석을 더해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책을 펼치면 두 작가의 상상력이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난다.

 

당신은 지금 어떤 계절을 지나고 있습니까. 괜찮은가요.
가만히 물어보는 일. 그리고 귀를 기울이는 일.
그러는 동안 나는 마치 햇빛을 마중하러 가는 듯한 마음이 된다.

한참을 귀 기울이다 보면 비로소 누군가의 마음이 어렴풋하게 모양을 드러내니까. 밤하늘이 서서히 밝아지듯이.
―「작가의 말」 중에서

 

 

관계의 다채로운 국면과

이색적인 시공간이 들려주는 이야기

 

책은 총 네 가지 장으로 나뉘는데, 그중 첫 구성 속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관계’다. 맨 처음 등장하는 소설 「토마토와 선인장」은 동네 도서관에서 열리는 시 쓰기 강좌에서 만난 두 사람을 그린다. 은퇴 후 그동안 꿈꿔왔던 시 쓰기 수업을 듣게 된 ‘나’(선인장)는 그곳에서 토마토 님을 만난다. 그는 자기소개 시간, 대부분의 중년 학생들이 각자 살아온 시간을 설명하며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데 반해 ‘그렇게 되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커피를 마시면서 혹은 순댓국을 먹으며 동병상련의 기분을 나누어 가진다. 이후 이어지는 소설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제가 펼쳐진다. ‘너무 좋은 사람’의 무해함이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기도 한다는 모순적인 생각(「미소를 기다리며」), ‘기훈’의 전 애인인 내가 그의 또 다른 전 애인에게 느끼는 묘한 감정(「구 여친 클럽」), 오래된 연인 사이 어긋나는 타이밍(「벚꽃 엔딩」)과 서로의 ‘엄친딸’로서 살아온 두 동갑내기의 일생(「지민이와 나」)까지. 그 일련의 관계들 속에서 유독 경쾌한 시선은 ‘요가원에서’ 멈춘다. 긴 시간을 건너 한 요가원에서 다시 만난 두 친구는 서로에게 너는 ‘좀 다르게’ 살 줄 알았다고 고백한다. 대학 시절, 더러운 연못에 빠진 채로 폭소했던 둘의 장면이 그 고백 뒤로 스쳐 지나간다(「요가원에서」).

 

그녀는 말했다. 자신이 ‘도마도’인 이유는, ‘토마토’는 앞으로 읽어도 토마토, 거꾸로 읽어도 토마토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앞뒤가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다. 또, 토마토가 채소라고 하기에도 과일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처럼, 자신 역시 그렇게 한 가지로 정의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귀밑머리가 희끗한 사람이 그렇게 되고 싶다, 고 말하는 게 좋아 보였다. 나를 포함해 다들 나는 이렇고 이런 사람이라고, 이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이렇게 되었다고 했지 다른 게 되고 싶다는 꿈 같은 건 더는 꾸지 않고 있었으니까.
―「토마토와 선인장」 중에서, 20쪽

 

두 번째 장의 시공간은 익숙한 골목부터 바닷가, 여행지와 이국의 어느 중앙역 계단을 넘나든다. “아무도 없는, 모든 게 정지된 듯한 밤거리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들에 관해” 적어낸 이야기들이다. 그 가운데 드러나는 풍부하고도 아름다운 문장들은 우리에게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광경을 선사한다. 특히 후반부에서 연달아 이어지는 세 편을 읽고 나면 “두꺼운 구름”이 “머리 위에서부터 피어올라 마을 전체로 퍼져가고 있는” 듯한(「네미」)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물속에서 올려다보는 것처럼” 일렁이고 흩어져 희뿌옇게 흘러가는(「고래 울음」), 해 질 녘의 초원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코끼리 무리처럼 마치 “시간의 속도에 저항하는 듯한”(「엘리펀트」) 모든 다정한 움직임을 감지하게 된다.

 

너는 문득 울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로등 불빛 속으로 천천히 헤엄치듯 걸어 들어갔다. 그림자를 길게 늘인 채로, 그림자의 끝을 내게 살짝 얹은 채로 너는 가로등 불빛을 올려다보았고 나는 너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내 몸에 닿아 있던 그 그림자의 끝을 쥐어보려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고래 울음」 중에서, 112쪽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의 쓸쓸함

그리고, 가능한 우리의 세계

 

세 번째, 네 번째 장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문진영 작가가 이전 책들에서 보여주었던 청춘의 현실을 담고 있으면서 낭만적인 쓸쓸함 또한 엿보게 한다. 표제작 「햇빛 마중」에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언’은 조금이라도 더 자기 위해 새벽마다 자전거를 타고 강변을 달린다. “같은 코스를 달려, 같은 시간에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애써 무언가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고 느끼기 위해서다. 그러던 어느 날 근처 편의점에서 우는 남자를 마주치는데, 짧은 대화가 오간 뒤 남자가 일어나 걷기 시작하자 성언이 그 뒤를 따라 걷는다. 담배를 나눠 핀 두 사람은 대교 위 환하게 빛나고 있는 불빛을 함께 바라본다. 남자와 헤어진 성언은 다시 달린다. 흐흐흐, 하고 실없이 웃어도 본다. 마치 햇빛을 마중 나가는 중인 듯한 그의 등 뒤로 동이 터온다.
그런가 하면, 동화 속에서 본 것 같은 장면들이 펼쳐지기도 한다. 작가의 꼼꼼한 설계를 따라가다 보면 이내 미지의 세계 속으로 탐험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공중을 떠다니는 상상을 하면 마치 무중력 상태인 듯 가벼워진 몸으로 둥둥 떠오르는 ‘나’의 세계 (「피터 팬」), 혹은 다이아몬드 광석이 떨어져 내리는 마을(「운석 사냥」)을 향해.

 

크리스마스 같지 않아요?
남자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말하더니 흐흐흐, 하고 웃었다. 그렇네요, 성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매일 밤 저 불빛을 종착점 삼아 여기까지 달려왔으면서도, 무감했었다.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다. 아름답다거나, 축제 같다거나, 그런 생각은. 남자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성언에게 건넸다. 담배를 끊은 지 오래였지만 성언은 그것을 받아 입에 물었다. 남자가 불을 붙여주었다. 성언이 담배를 다태울 때까지 곁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말했다.
고맙습니다.
―「햇빛 마중」 중에서, 179쪽

 

작가는 앞선 소설들에서 보여준 관계에 이어 또 다른 관계들, 특히 동식물과의 관계를 세밀하게 드러낸다. 잃어버린 길고양이를 향한 상실감과 끝나지 않을 애정(「봄의 실종」), 떠돌이 개의 시점에서 쓰인, 역경과 질병이 뒤따르는 길 생활 이야기(「어이」), 낡은 동물원에서 보았던 북극곰에 대한 기억 등, 내내 우리 곁에 있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던 순간들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한다. 이는 일상의 장면 장면을 들여다보는 그만의 고유한 시선 속 자연스러운 이동이자 포착일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기 시작한 것은 한 달 전쯤이었나. 1년쯤 되었을 수도 있다. 앞서 걷는 김씨의 두 다리가 날이 갈수록 흐릿해졌다. 마침내 나는 리어카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그러기를 몇 차례, 결국 김씨가 걸음을 멈추고 내게로 다가왔다. 내 겨드랑이에 두 손을 넣어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그는 한참 동안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의 희미한 윤곽만이 보였으나, 그의 따뜻한 숨이 내 얼굴에 동그랗게 닿아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나를 리어카 위에 올려놓았다.
―「어이」 중에서, 1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