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면 나를 더 알게 되면서도 한편으로 더 모르게 돼.
그래서 내가 닳지 않는 느낌이 들어.”
 

쓰는 일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는 
두 시인의 시와 시인에 대한 이야기

 

시작은 장수양 시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공고문이었다. 2주간 통화로 스터디를 함께할 친구를 구한다는 내용이었고, 이에 문보영 시인이 댓글을 달아 둘만의 유선 스터디가 성사되었다. 공고문에 쓰여 있던, 스터디의 규칙들은 대부분 무너졌다. 계획했던 횟수와 통화 시간을 초과해 약 2년간 이어진 대화는 정해진 주제에 머무르지 않고 이 고개, 저 고개를 넘나들며 여러 샛길로 향했다. 이 책 『토끼는 언제나 마음속에 있어』는 두 시인이 나눈 대화와 우정의 기록이다.
제멋대로 흐르는 듯 보이는 대화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는 늘 ‘시’가 있다. 누구보다 시를 좋아하면서도 괴로움을 느끼곤 했던 두 젊은 시인의 고민들이 한 권 책에 담긴 셈이다. 시에 대한 긴 기다림과 만성적인 슬럼프를 겪던 이들은, 툭 터놓고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이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냈다.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서로의 시를 분석해주고, 가끔은 한 장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함께 시를 쓰기도 했다. 시의 형식, 변화와 연속성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들에게 시란 “진심이 되고 싶은 거짓말”이자 “스스로의 언어를 만드는 일”이다. 그에 가닿기 위해 좋은 거짓말들을 연습하고, 문장 안의 요소들을 잘게 쪼개어본다. 필명 또는 부캐를 만들어 나만의 은신처를 만들어보기, 과거 내가 썼던 시에 응답하기, 다른 사람의 시를 따라해보기, 할 말이 다 떨어졌을 때조차 할 말 없음의 상태로 써보기, 혹시나 길에서 시의 재료를 얻게 될까 살피며 걷다가 풍경에 부딪히는 일까지 이들에게는 모두 시 쓰기의 과정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 시인은, 기꺼이 계속 잃는다. “세상이 행복하고 질서 잡혀 있다는 환상에 질문을 던지는 게 문학의 역할 중 하나”라고 믿으며. 무언가를 잃어버린 대상들, 상실의 집합에게 초점을 맞추어 삶의 어두운 부분들을 비춘다.

 

“세상이 행복하고 질서 잡혀 있다는 환상에 질문을 던지는 게 문학의 역할 중 하나겠지. 갈등을 봉합하고, 화해하며 끝나는 이야기들은 때때로 삶의 어두운 부분이나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을 은폐하기도 하니까. 그래서 문학은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들과 손절하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온 걸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이 슬퍼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해야만 문학인 것도 아니잖아. 언제부터인가 문학의 본질은 뭔가를 계속 잃는 게 된 것 같아. 아무것도 구하지 않고 끝나.” “엄청 슬픈 강박이다. 이런 게 어딨어? 계속 잃어야 하는 직업이.” “계속 잃어야 하는 직업.” “꼭 상실의 집합 같아.”
―34쪽

 

 

함께 읽기,
책 속에서 ‘시’를 발견해내는 일

 

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가지는 ‘함께 읽기’다. 책의 내용을 다루는 대화 역시 다른 대화들처럼 점차 시와 글쓰기로 퍼져나간다. 먼저 등장하는 책은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집 『세상의 생일』이다. 그중 단편 「고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에 관해 대화가 오가는데, 두 사람은 ‘고독’을 두고 ‘생물적인 고독’ 또는 ‘좋은 고독’이라 이름 붙여본다. ‘좋은 고독’이란 무엇일까. 이는 문보영 시인이 겪은 치앙마이에서의 고독을 예로 들 수 있다. 외국에서 한 달 동안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았던 그의 경험은 단순한 단어들만을 사용할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전달한다. 구체적이지 않은 문장으로 사유할 수 있는 어렴풋함, 희미함에 대한 두 시인의 애호와 소망은 마치 시 쓰기의 한 방법을 눈치챈 듯한 기분을 선사한다.
두 번째로 다루는 책은 토베 얀손의 『정직한 사기꾼』이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토끼는 언제나 마음속에 있어”의 ‘토끼’는 주인공이자 동화작가 안나가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그리게 된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요구에 기꺼이 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책의 마지막에서 안나는 더 이상 토끼를 그리지 않는데, 두 시인은 이를 두고 외부의 요구로부터의 독립이라는 단순한 결론을 내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위한 글을 쓰는 일에 골몰한다. “우리도 정직한 사기꾼일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쓰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더 어려운 것 같아. 내가 내 맘대로 썼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좋아해주었을 때 누가 날 있는 그대로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난 그것만 기다리는 것 같아.” “나도 그런 순간을 기다려.” 같은 책을 읽고 서로 느낀 감정을 공유하는 과정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다시 시에 대한 고민으로 돌아오는지 그 양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속에서 우연히 튀어나온 말들이 오래 우리 마음속에 남게 될 것이다. 정직한 사기꾼 속의 동화작가 안나가 타인의 사랑을 바라며 덧그린 토끼처럼.

 

“외국어를 사용하면 하고 싶은 말을 부정확하게 표현하게 되고, 진심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니까 내가 구체적이지 않은 사람이 돼. 그래서 분노도 덜 구체적인 것이 되고, 감정을 덜 느끼게 된달까……? 그래서 화도 누그러져. 모든 게 어렴풋해져서 좋아.” “나는 구체적인 게 늘 좋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때는 희미해지고 싶을 때도 있는 것 같다!”
―69쪽

 

 

딩동! 두 시인의 ‘초인종 상담’
우리가 같이 쓰는 방법

 

마지막으로, 책의 후반부에는 문보영, 장수양 시인의 고민을 포함해 ‘초인종 상담’이라는 이름 아래 다른 이들의 시에 대한 고민들이 담겼다. 글쓰기에 대한 질문을 두 시인에게 보내면,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답변을 보내주는 형식이다. 시와 문장의 형식, 글쓰기 루틴, 내면의 이야기를 꺼내놓기, 지금이 아닌 60대에 시인이 되는 방법까지 다양한 물음들에서 출발한 대화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공감하는 일로 마무리된다. 시를 향한 진지하고도 유쾌한 물음과 대답을 읽어가던 와중 어느새 그 안에 녹아 있는 일상의 난처함, 관계의 어려움, “원하는 방식으로만 들키고 싶은” 기분들까지, 소박하면서도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이 감정들이 나만 느끼고 있던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에 다다른다. 온통 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책이 결국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가닿게 되는 지점이다. 책을 읽고 나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한없이 재잘대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