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 사상가 폴 발레리의 아포리즘을 한 권에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수없이 인용‧애송되어온 문구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이 구절은 바로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가 1920년에 발표한 시 「해변의 묘지」의 한 구절이다. 1875년에 태어난 폴 발레리는 20세기 전반기 유럽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사상가로 시, 산문, 평론 등 다양한 글을 발표했고 노벨문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으며, 프랑스 최고 권위의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을 만큼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폴 발레리의 문장들』은 발레리의 아포리즘을 모아 엮은 책이다. 발레리의 아포리즘은 그만의 독특한 작업 방식에서 탄생했다. 문학에 심취했던 젊은 시절, 한 사건을 계기로 문학에 회의를 느끼고 실존적 위기를 겪은 발레리는 그때부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문학, 언어, 기억, 역사, 정치 등 방대한 관심사에 대한 단상을 노트, 즉 ‘카이에(cahier)’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작업은 51년간 이어지고, 발레리는 카이에 261권을 남겼다. 이 카이에에 담긴 아포리즘을 번역가 백선희가 직접 뽑아 엮은 책이 『폴 발레리의 문장들』이다. 때로는 생의 이면을 꿰뚫는 날카로운 눈길로, 때로는 해학적인 눈길로 펼치는 아포리즘은 독자로 하여금 삶을 다시 바라보고, 곱씹고,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

광활한 대기가 내 책을 펼쳤다가 덮고

파도가 바위에서 솟구치며 산산이 부서진다!

날아가라, 나의 현혹된 페이지들이여!

부수어라, 파도여! 흥겨운 물살로 부수어라

돛배들이 모이를 쪼고 있던 저 평온한 지붕을!

―시 「해변의 묘지」에서



“우리에게 내일은 곤충에게 불빛의 유혹과 같은 것인지 모른다”

독자들에게 전하는 인생에 대한 통찰


폴 발레리의 인생은 크게 세 가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문학에 매혹되었던 젊은 시절, 시를 쓰지 않고 침묵하며 보낸 20년, 그리고 다시 시를 쓰면서 작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던 말년. 13세부터 시를 썼고, 앙드레 지드, 말라르메 등과 교류하며 문학을 꿈꾸던 21세의 발레리는 제노바로 여행을 간 어느 날, 천둥 치는 밤에 부조리한 감정에 사로잡혀 실존적 위기에 봉착하고, 그 이후 문학에 거리를 두고 자신의 정신을 명료하게 탐구하려 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죽을 때까지 51년간 매일 새벽에 일어나 총 261권의 작가 노트, 카이에에 자신의 단상들을 기록한다. 당대의 지성 발레리가 인생과 정신의 본질을 탐구하려 분투한 산물인 이 아포리즘들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빛나는 통찰을 오늘날 독자에게 건넨다. 

『폴 발레리의 문장들』은 총 5부, 574편으로 구성되었다. 1부 「삶」, 2부 「인간」, 3부 「자아와 타자」에서는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을, 4부 「생각과 정신」은 명료한 정신의 법칙을 탐구하기 위해 몰두했던 발레리의 ‘생각에 대한 생각’을, 마지막 5부 「문학」에서는 문학과 글쓰기에 대한 발레리의 단단한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발레리만큼 지적인 언어로 읽는 즐거움을 주는 작가는 많지 않다. 그는 많은 이들이 즐겨 인용하는 작가다. 아포리즘 형태로 간결하게 압축되어 통찰력이 빛나는 글이 많기 때문이다. 그의 생각은 경계 없이 뻗어나가고, 그의 눈길은 현미경처럼 배율을 바꿔가며 우리의 온갖 뒷걸음질과 어리석음, 엉터리 추론, 편견, 실수, 무지, 무능을 포착해낸다. 그의 언어는 흔들고 꼬집고 비튼다. 절대 명제들도 그를 만나면 권위를 잃고 겸손해진다. 거만하던 “코기토 에르고 숨(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도 기세가 한풀 꺾여 “나는 때때로 생각한다. 고로 때때로 존재한다”가 된다. 

―「들어가며」에서



“발레리를 읽고는 내 기다림이 끝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지적인 언어로 읽는 즐거움


나는 홀로, 기다려왔습니다. 

나의 온 작품이 기다려왔지요. 

그런데 발레리를 읽고는 내 기다림이 끝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자신의 정신 활동을 탐구하면서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지던 생각과 사실 들을 끝없이 돌아보고, 언어의 정확성을 추구했던 발레리. 20년간 시를 발표하지 않았고, 시집 출간 제의를 받고는 수년간 퇴고를 거듭한 일은 언어와 인식에 대한 그의 엄격한 신념을 드러낸다. 이런 태도를 품고 써 내려간 아포리즘은 사유의 정수를 풀어놓으며 독자들의 잠든 정신을 흔들어 깨운다.

‘곤충이 불빛을 바라듯 존재는 삶을 바라는’, 인생의 불가항력적 속성을 들여다보는 「삶」에는 인생에 대한 발레리의 생각이 속속들이 드러나 있다. 이를테면 “역사 속 그 무엇도 인간에게 평화롭게 살 가능성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며 인생을 비관하면서도, “열정 없이는, 오류 없이는 ‘진리’도 없다”며 진리를 향한 탐구를 강조한다. 이외에도 권력, 신념, 종교 등에 대해 풀어놓는 아포리즘도 깊은 통찰을 전한다.

「인간」은 ‘인간’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발레리가 보기에 “인간은 있을 수 있는 온갖 고통과 지고의 쾌락을 지고 두 다리로” 버티는 존재다. 사랑, 행복, 고통, 허영심 등의 인간적 감정을 탐구하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묘사한다. 그러면서 발레리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가치를 부여”하라는 따뜻한 조언을 건넨다.

「자아와 타자」에서는 ‘자아’라는 화두에 천착하면서 개인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자아’라는 ‘생각’,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자아’에 대해 논한다. “우리에게 쏠린 판단들이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는 건 모든 판단이 생겨나는 데 필요한─그리고 반드시 우리에게 부과되는─피할 길 없는 단순화 때문이다” 같은 아포리즘이 눈길을 끈다.

「문학」에서는 중요한 문학 주제인 형식, 어조, 독자, 비평 등에 대해 짧지만 명쾌하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데, 문학을 향한 발레리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를테면, 문학에서 좋은 형태는 “우리가 바꾸지 못해 반복해서 모방하는 형태”며 “기억력은 작가가 쉬이 잊힐 법한 형태들을 구상하고 고정한다고 느끼면 경고한다”고 말한다. 독자에 대한 아포리즘도 흥미롭다. “능동적이고 반항적인 독자의 정신이 언제나 책의 부분들을 바꾸려는 시도들을 버텨내는 작품은 탄탄하다”고 하며, 독자들에게는 책을 읽을 때 “타인들이 겪은 경험의 결과를 잘 빌려서 그들은 보았으나 우리가 보지 못한 것으로 우리를 키워야 한다”고 역설한다. 

발레리가 평생 자신의 정신 활동의 탐구에 몰두한 만큼 「생각과 정신」은 독자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법한 아포리즘으로 가득하다. “우리의 중요한 생각들은 우리의 감정과 어긋나는 것들이다” “생각의 진짜 길이는 그저 더듬거림일 뿐이다” “잘못 관찰된 사실은 나쁜 추론보다 훨씬 해롭다” 등 독자는 발레리 사유의 만찬을 누릴 수 있다.

이뿐 아니라 발레리의 아포리즘을 직접 엮은 백선희 번역가가 발레리와 책에 대해 소개하는 「들어가며」와, 꼼꼼하게 정리한 「폴 발레리 연보」는 『폴 발레리의 문장들』을 읽는 독자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