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주름을 마주할 때 작품은 한 편의 시처럼 피어난다”
시인, 비평가 그리고 산책자 나희덕의 예술 읽기


 등단 32년째를 맞은 시인 나희덕의 예술 산문 『예술의 주름들』이 출간됐다. 나희덕 시인이 예술 작품만을 대상으로 한 글을 엮어 책을 낸 것은 처음이다.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나 시인은 문학을 기본으로 하되, 오랜 시간 인문·예술 영역 전반에 걸쳐 읽기와 쓰기를 지속해왔다. 이러한 관심사가 시의 모티프가 되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예술의 주름들』은  그의 시집들과도 연장선상에 있다. 그의 시에서 쇠라의 점묘화 속 점들은 “선들이 내지르는 굉음을 견딜 수 없어 선을 빻고 또 빻’인(「쇠라의 점묘화」) 것으로 상상되고, 화가 이중섭의 불운한 삶은 “빈 조개껍질에 세 든 소라게”(「이중섭의 방」)로 그려진다면,『예술의 주름들』은 예술 작품이 시가 되기 이전, 시인이 작품을 마주한 순간의 감응과 해석이 산문의 언어로 펼쳐지는 장이다.
아녜스 바르다, 류이치 사카모토, 케테 콜비츠, 로스코, 조동진 등 책 속에 호명된 예술가들은 장르도 개성도 각기 다르지만, 시인이 ‘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을 발견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나희덕의 시적 자아와 비평적 자아가 동시에 작동하며 쓰인 30편의 글들은 특유의 공감력과 사유를 통해 예술 작품 앞에서 우리가 느꼈던 미묘한 감정을 헤아리게 한다. 거미가 가느다란 씨줄과 날줄을 뽑아내듯 시인이 언어로 직조해낸 풍경은 독자들의 감각을 일깨우며, 예술의 숨겨진 ‘주름’으로 이끄는 것이다. 무엇보다 예술의 세계에서 길어 올린 메시지와 태도―자연을 중심으로 한 생태적 감수성(1부), 여성주의 정체성 탐색(2부), 예술가적 자의식의 탐구(3부), 장르의 경계를 흔드는 실험(4부), 시와 다른 예술의 만남(5부)―는 지금, 여기 우리 삶의 한계를 넘어서게 할 통찰로 가득하다.

   

예술이란 얼마나 많은 주름을 거느리고 있는가.
우리 몸과 영혼에도 얼마나 많은 주름과 상처가 있는가.
주름과 주름, 상처와 상처가 서로를 알아보았고
파도처럼 일렁이며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였다.
“세계와 영혼의 주름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비틀림이다.”
질 들뢰즈의 이 말처럼
세계와 영혼의 주름들을 해독하려 애를 쓰며
몇 개의 겹눈이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의 눈으로 읽어낸 예술의 옆모습이
모쪼록 독자에게도 고개 끄덕일 만한 것이 되면 좋겠다.
_「책머리에」에서



시를 통해 작품을 천천히 사유하는 즐거움
시인의 예술 읽기는 문학의 자리로 돌아온다   


『예술의 주름들』의 바탕에 흐르는 일관된 시선은 ‘시를 통한 예술 읽기’다. 시인은 시적 서정이나 태도가 담긴 예술에 눈 돌리고, 언뜻 시와 무관해 보이는 작품 앞에서도 시를 떠올려, 이를 돋보기 삼아 작품과 만나는 것이다.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수영장>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나희덕이 주목한 것은 그의 판화 연작에 드러난 문학적 요소, 즉 그림과 시 텍스트가 결합된 방식이었다. 호크니는 월트 휘트먼, 에즈라 파운드 등을 비롯한 몇몇 시인들의 시를 그림 속에 문자 이미지로 자주 인용하곤 했는데,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그의 성정체성 등 정체성 위기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영화 <타인의 삶>을 보면서는 한 극작가의 삶을 감시하는 동독 비밀경찰의 이야기를 통해 타인의 존재가 개인에게 갖는 의미를 질문하는데, 이 과정에서 시인이 짝지은 아담 자가예프스키 시는 영화 읽기의 열쇠가 된다. 폴란드의 시인 자가예프스키의 시「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에서처럼 주인공이 마주한 타인의 시선은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교감을 열어주는 통로”로 기능한다.


자가예프스키는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 아니”라고. (...) 시적 화자가 앉아 있는 곳은 닫힌 방이 아니라 저녁 무렵의 광장이다. 그 열린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열심히 바라보며 화자는 “저마다 다른, 각자 뭔가를 말하고, 설득하고, 웃고, 아파하는 얼굴들”을 읽어내려고 애쓴다. 레비나스가 말했듯이, 타인의 얼굴은 우리에게 불현듯 들이 닥치는 존재들이다. 그 순간 타인의 얼굴은 “등불처럼” “용접공의 점화기처럼” 빛난다. 이렇게 아름다움이란 늘 바깥에 있는 어떤 것,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것이다. <타인의 삶>에서 비즐러가 마침내 도달한 얼굴처럼.
_246~248쪽


문학적 관심사를 바탕으로 한 예술 읽기는 때로 시인 자신의 시를 호출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시인은 롤랑 바르트의 어머니와 사진작가 한설희의 사진 속 푼크툼의 순간을 다룬 장에서 자신의 시「주름들」을 인용한다. 시 속에서 화자는 엄마의 주름이 “골짜기처럼 깊어 / 펼쳐들면 한 생애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며 주름을 통해 당신의 전체를 마주했다고 고백한다. 또한 저자의 몸을 통과한 작품은 그대로 시가 되기도 하여, 크고 작은 집들로 채워진 장민숙의 반구상 회화 <산책>은 「창문성」이라는 시를 낳았다. 회화 <산책>이 창문의 색채와 형태를 통해 집의 표정을 전한다면, 「창문성」은 “눈빛” “입술” “항문”으로, 창문을 몸의 일부에 빗대어 독자로 하여금 집과 좀 더 내밀한 관계를 맺도록 이끌며 그림의 의미를 확장한다. 이처럼 시적 상상력으로 예술을 쓰다듬은 『예술의 주름들』에서는 “시와 예술 사이에” 난 여러 갈래의 “작은 길”들을 만날 수 있다.


보편적 공감을 부르는 편애의 기록
예술은 벽 너머를 상상하게 한다 


예술 산문에는 저자의 취향이 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으며 나희덕 시인 스스로도 이 책이 ‘편애의 기록’임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의 주름들』이 단순한 취향의 집합체에 머물지 않는 것은 저자가 다루는 작품들이 우리에게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버려진 지역에서 벽화나 사진 작업을 통해 새로운 벽을 창조하고, 벽 너머를 보게 하는 아녜스 바르다를 책의 첫 장에 소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바르다의 예술 속에서 벽은 “더 이상 우리를 가두는 장애물이 아니라 즐거운 몽상의 통로”가 되며 우리는 예술을 통해 고정된 정체성을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은 2부 「나, 스스로의 뮤즈가 되어」에서처럼 모성이나 섹슈얼리티에만 갇히지 않는 풍요로운 여성성일 수도, 3부 「이것이 그의 자화상이다」에서처럼 독자적 세계를 창조하는 극한의 정신일 수도 있다. 또한 여기에는 「경계 없는 창조자들」에서처럼 예술의 장르를 넘나드는 새로운 경험도 빠질 수 없다. 시인은 이러한 예술적 횡단을 거쳐 5부 「시는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도착한다」에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시로 돌아와 언어에 담긴 사회적 기억을 환기하며 책을 끝맺는다. 독자들은 시인이 읽어낸 예술의 주름들 속에서 새삼 예술의 힘을, 벽을 벽 아닌 것으로, 또 자유와 해방을 향한 공통 언어로서 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하찮은 잎사귀”(『그곳이 멀지 않다』)로 보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