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나눔 우수문학도서 선정

 

 

전 세계 여행자, 생애 첫 번지 옛집에서 자유를 찾다
대도시의 섬 같은 집 이야기


 

서울 홍제동 아파트 단지 안,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집이 있다. 지인과 동네 사람들의 입소문을 탄 이 집은 신문과 방송에 나오면서 세간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2004년 <중앙일보> ‘위크엔’, 2004년 KBS 1TV <피플 세상 속으로>, 2006년 SBS 스페셜 <집에서 집(家)을 찾는다>).
이 집엔 대문이 없다. 그런데 이름이 있다. ‘학소도鶴巢島’가 그것. 학소도에는 집주인 최범석 씨와 그의 애견 보너가 살고 있다. 이 책 『여행자의 옛집』은 저자 최범석이 20년 만에 찾은 고향 집 학소도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이 집에서 태어나 12년 동안 살다가 가족을 따라 독일로 가면서 집을 떠났다. 그 뒤로 독일과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내고 20대에 세계 70여 개 나라를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1979년 집을 떠난 뒤로 홍제동 집은 그의 기억에서조차 희미한 옛날 집일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옛집이 그를 ‘불렀’다. 떠난 지 꼭 스무 해 만의 일이다. 스스로를 ‘방랑자’요 ‘신세대 유목민’이라 명명할 만큼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던 남자, 최범석. 그런 그가 지난 11년 동안 옛집에 터를 잡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책은 도시에서 태어난 사람들에게도 고향 집이 있음을 일깨운다. 그곳에서 적극적으로 제2의 인생을 개척해온 사람의 이야기. 그를 통해 ‘집’과 ‘자기다운 삶’의 참 의미를 돌아보게 된다.

 

 

낡고 버려진 집을 ‘이름 있는 집’으로
노동에서 희열을, 자연에서 지혜를 얻다

 

15년가량 해외에 머물다 귀국한 저자는 1999년 겨울 어느 날 또다시 여행의 충동에 사로잡힌다. 궁리 끝에 그가 찾아간 곳은 폐가나 다름없던 홍제동 집. 그곳에서 애완 진돗개 인왕이와 함께 캠핑과도 같은 하룻밤을 보낸다. 그때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것이 또 다른 여행이자 인생의 출발점이 될 줄은. 아파트 단지에 버려진 헌 가구와 물건을 가져다놓으며 고향 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이 집에서 보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오버랩되어 다가왔고, 처음 느꼈던 당혹감과 낯섦이 사라져갔다.


처음엔 모든 게 우연이었다. 고향 집에 찾아든 것부터가 그랬고 식목일 캠페인으로 나누어주는 묘목을 받아 심은 것도, 선배의 말 한마디에 친구들을 불러 페인트칠을 한 것도 다소 충동적인 실험이었다. 집에 ‘학소도’라는 이름을 붙인 일도, 마당에 채소 씨앗을 심은 일도 사소한 계기에서 비롯했다.
그런데 결국 그 모두가 그의 삶과 가치관을 바꾸어놓았다. 시행착오 끝에 심은 묘목은 자라면서 숲과 같은 정원을 이뤄 자연의 신비로움을 보여주었다. 칠하고 문지르고 때워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노동의 기쁨과 땀 흘린 보람을 얻었다. 아버지의 제안으로 농담 삼아 붙인 당호 ‘학소도’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에서 붓글씨로 된 편액을 발견하면서 큰 울림으로 되살아났다. 아버지의 인생과 자식에 대한 사랑, 그리고 집이 주는 의미까지 선물받은 것이다. 뜻 모를 외래어로 된 아파트 이름이 난무하는 요즘, 자신의 집에 이름을 붙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는 학소도에서 생활하기 전까지 마음에 드는 옷은 돈 주고 사 입는다는 생각만 했지, 내가 원하는 옷을 새로 만들거나 수선해서 입는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 공간을 얼마만큼 자유롭고 개성 있게 꾸며나가는가는 전적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의 몫이다. (…) 친구들과 지인들이 가끔 나에게 묻는다. “학소도 잘 있지?” 마치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안부를 묻는 것같이 정감 있는 인사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집에 이름을 지어준 게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내가 사는 집에 당호를 붙인다는 게 어색했지만, 지나고 보니 집도 하나의 이름을 가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106~111쪽에서

 

아파트를 이웃으로, 인왕산을 뒷산으로 삼은 집. 얼핏 보아 여느 단독주택과 달라 보이지 않는 집 학소도는, 집주인의 애정과 노력으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집주인 최범석 씨도 이 집과 닮았다. 밖에선 회사 업무로 바쁜 여느 남자이지만, 집에 오면 장작으로 난로를 때고 나무 열매로 과실주를 담그며 부지런히 텃밭을 일군다. 그곳에 듬직한 애완견들과의 추억이 서려 있고 수많은 지인들과 함께한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학소도를 아는 이들에게 그곳은 삭막한 도심 속의 따뜻한 섬이다.


 

‘지금 여기’서 시작하는 여행
‘자기다움’을 실현하는 법에 대하여

 

저자 최범석은 말한다. 학소도에서 자신은 왕도 되고 시인도 되고 농부도 된다고. 그러나 동시에 강조한다. 학소도가 진짜 섬이라면 이곳에 살지 않을 거라고. 그의 집은 밖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내려놓고 가장 솔직한 자아를 실현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도피처는 아니다. “살아 있는 한 현실의 출구는 또 다른 현실의 입구”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안다. 그리고 그 현실 안에 환희와 행복이 있다는 것도. 타고난 여행자인 그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나날이 새로운 곳, 자신의 옛집에서.

 

학소도의 뜰에서 나는 여행을 하듯 즐겁게 방황하고 수많은 예기치 않은 만남을 통해 새로움을 경험한다. 밖의 현실에서 잃어버린 생기를 나의 도피처인 비밀 정원에서 되찾는다.
-176쪽에서

 

대학 강의실에서, 지구촌 여행길에서, 내가 이제껏 만난 사람들에게서 배우지 못한 많은 것을 고향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 나는 자연을 통해 정직한 사랑을 배우고 있다. 농부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고, 육체적 노동의 소중함도 깨달았다. 고향 집은 또한 내가 나의 과거와 대화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었다. 과거의 내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다는 자명함을, 귀향한 나에게 직접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학소도는, 부모님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지금도 들려주고 있다.
-236쪽에서
 
우리가 비록 저자의 뜻에 공감한다 해도, 그처럼 실천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 산다면 더욱 동떨어져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학소도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건, 우리가 발 딛고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일구고 바꿔나갈 때, ‘현실의 또 다른 출구이자 입구’가 열린다. 편안함과 행복을 찾아 멀리 떠나려 하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 자신만의 여행을 떠난 사람. 그의 이야기가 우리의 마음에 신선한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