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평론가 손희정, 13인의 여성감독을 만나다
이토록 찬란한 여성 서사의 세계


2018년 개봉한 <미쓰백>(이지원 감독)은 개봉 초기 흥행이 부진했지만, 영화 속 여성서사가 관객들의 큰 호응을 얻으며 팬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쓰백러’로 칭한 여성 관객들이 SNS를 중심으로 영화 홍보물을 확산하며, N차 관람 열풍을 이끈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2019년에는 <82년생 김지영>이 368만 명의 관객 수를 기록했고, 2020년에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강세를 보였으며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독립영화임에도 3만 관객을 동원했다. 왜 관객들은 소위 ‘영혼 보내기’로 불리는 티케팅에 매진하며 이토록 여성영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여성감독들이 일으킨 이 새로운 물결의 정체는 무엇일까?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는 이 질문에 대한 한 가지 답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2019~2020년 장편 극영화를 선보인 여성감독 13인-김도영, 윤가은, 김보라, 장유정, 임선애, 안주영, 유은정, 박지완, 김초희, 한가람, 차성덕, 윤단비, 이경미 감독-과 나눈 인터뷰를 엮어 여성영화 유니버스를 펼쳐 보인다. 그간 젠더 관점의 문화비평을 활발히 해온 이력답게 손희정의 인터뷰는 영화를 둘러싼 “여성의 애증, 욕망, 우울과 낙관을 두루 살피게” 하며, 이 작품들이 어떻게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자리매김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무엇보다 영화 전공자의 시선으로 카메라워크·사운드·공간 등 영화의 구성 요소를 묻는 대목에서는 관습적이지 않은 신(Scene)들이, 얼마나 많은 디테일을 고려해 연출되는 것인지를 엿볼 수 있다. 이제 “남자들의 이야기만 상상”하기를 멈추고, 여성들의 이야기를 공적인 서사로 선보이기까지, 감독들이 통과한 시간을 만나보자.


서로가 서로를 만나고 연결되면서 ‘여성영화’의 자장은 점점 확장되었다. 한 편 한 편의 작품은 독자적이지만, 그런 고유함들이 연결되고 주저하지 않는 말들과 만나면서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우주, 깊고 넓은 여성영화 유니버스를 형성해나갔다. “참 잘 만든 영화죠, 그런데요……”가 아니라 “참 좋은 영화죠, 참 좋은 영화예요”로 설명이 충분한 작품들이 쌓이면서 나 역시 보태고 싶은 말이 많아졌다. 그래서 쓰기로 했다, 이토록 풍부한 여성영화의 세계에 대해서.
_8쪽에서



감독들의 세계를 향한 힘 센 사랑, 깊은 대화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여성영화 프리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에 다뤄지는 영화들은 그간 카메라 밖으로 밀려났던 여성들의 삶에 렌즈를 들이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일곱 살 보리(<콩나물>)에서 여중생 은희(<벌새>), 이십 대의 자영(<아워 바디>), 삼십 대의 지영(<82년생 김지영>), 마흔 줄의 찬실이(<찬실이는 복도 많지>), 69세 효정(<69세>)까지 인물들이 겪는 성장통, 우울, 육아, 정체성 찾기, 폭력 등은 동시대 여성들의 경험과 겹치며,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이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님”을 확인하게 한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것은 인터뷰에서 다뤄지는 영화의 범위다. 손희정은 감독별로 대표작 한 편에 천착하기보다 필모그래피 전체를 살피면서 변주되는 서사와 이미지, 캐릭터, 대사, 메시지에 대해 질문하는데 이는 감독들이 걸어온 영화적 시간을 재구성하며 영화의 의미를 한층 세심하게 드러낸다. 예를 들어 이경미 감독의 <보건교사 안은영>의 ‘은영’(정유미 분)은 <미쓰 홍당무> 미숙(공효진 분)의 영웅 버전이자, <비밀은 없다>의 연홍(손예진 분)이 못했던 일을 해내는 인물이기도 하고, ‘서로를 구제하는 여자들’은 이경미의 영화에서 반복되는 모티프이다. 캐릭터와 모티프 외에 영화 형식의 측면에서 컷과 컷 사이의 편집 방식, 카메라의 눈높이(eye level), 타 장르의 차용 등을 다루는 대목도 흥미롭다.


클로즈업은 클로즈업이고, 미디엄쇼트는 미디엄쇼트일 뿐이다. 중요한 건 찍는 방식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 놓인 맥락이다. 물론 불필요한 노출은 피했다.
그리고 몸을 아주 디테일하게 찍으려 했다. 자영이가 옷을 벗고 달라진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는 모습을 찍을 때도, 어디에 있는 어떤 근육을 찍을지 사전에 정확하게 조율했다. 여성의 몸을 대충 훑는 것과는 다르게 보였을 것이다.”
_151쪽


한편, 2부 ‘역사’에서는 1부 감독들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던 토대로서,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 상업영화의 전환을 이끌었던 여자들의 역사를 다루었다. ‘작가’로서 감독이 중심이 되는 영화 비평이나 영화사 서술은 자연히 남성의 계보가 되기 마련인데 손희정은 이런 서술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당시 여성 제작자, 영화인,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의 활동을 기록함으로써 이들을 한국영화의 새로운 성장을 이끈 뿌리로서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억해, 우리가 함께한 장면들을……”
서로가 서로의 영화가 되어 ‘다시, 쓰는, 서사’


인터뷰는 인터뷰어가 가진 정체성을 통과한 문답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주관적인 장르이며 결과적으로 상대에 대한 평가가 빠질 수 없는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다혜(<씨네21> 기자, 작가)의 말처럼 손희정은 여성감독들의 작업을 함부로 평가하기보다,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함께 말하기’의 방법을 택한다. 그들의 전작을 살피고, 제작환경을 묻고, 관객들의 반응을 전하는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은 꽤 다른 영화지만, 놀라울 정도로 닮은 부분이 있다. 그건 바로 스크린 위로 스며 나오는 지연과 지영의 정서다. 일상을 정신없이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에 ‘퍽’ 하고 퓨즈가 나간 듯,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순간. 그러나 그건 그저 하나의 표정, 하나의 장면이 아니다. 그 안에는 어떤 식으로도 충분히 언어화할 수 없는 공허함과 불안의 정서가 녹아 있다._22쪽에서


이러한 곡진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주인공이 탈코를 했다” “성적 대상화가 없다” “실화 베이스다” 같은 몇 개의 명쾌한 기준으로 여성영화를 정의하지 않는 것은 그가 여성영화를 보는 다양한 관점을 가능한 한 넓게 열어두고자 함이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관습적 이야기를 뒤트는 도전을 살피고, 자신의 소수자성을 바탕으로 타자의 사정을 살피는 이야기들에 주목하는 언어는 납작할 수 없으므로. 여성영화 르네상스가 도래한 지금, 이야기는 언어를 만들고 진부하지 않은 이야기는 다른 세계를 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