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그리는 뉴요커가 음미한 진짜 뉴욕
“뉴욕에 있는 나를 의미 있게 하는 것”


뉴욕, 뉴요커라는 단어는 이제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에 매혹된 이들의 환호성은 여전하다. 왜 언제나 뉴욕인가, 뉴요커인가. 여기 한국화를 그리는 한 화가가 ‘살고 사랑하고 아트 하는’ 조금 특별한 뉴욕이 있다. 뉴욕이라는 환상의 장막을 들추고 다시금 새로운 뉴욕을 느끼고 사유케 하는 열정적 기록이다. 그렇게 다시, 뉴욕이다.
저자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공부하고 15년 전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화가다. “가슴속 깊이 자리 잡은 꿈. 15년 전 나를 뉴욕으로 오게끔 한 그것. 나를 아직도 뉴욕에 붙들어 매고 있는 그것”을 되뇌며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뉴욕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지” “뉴욕에 있는 나를 의미 있게 하는 게 무엇인지” 날마다 스스로 묻는 아티스트다. 뉴욕이라는 난공불락의 성 가운데 한 예술가로서 또 생활인으로서 영위해가는 소중한 일상과 그 속에서 포착한 매혹적인 순간들을 독자에게 펼쳐놓는다.  
거기에는 뉴욕이라는 도시와 여기서 살아가는 뉴요커들이 선물해준 열정에 대한 각성이 있다. 그리고 뉴욕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한 획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오롯이 체감하는 한 인간이 느낀 미적 쾌감이 가득하다. 뉴욕을 사랑하는 다양한 뉴요커들의 이야기와 저자가 사랑한 뉴욕의 일상은 직접 담은 생생한 그림과 사진으로 숱한 뉴욕 가운데서도 또 다른 빛깔의 속살을 선물한다.


뉴욕에서의 하루하루가 모두 모여서 5,500일이 되었고 그 뉴욕에서의 5,500일이 나를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든 듯하다. 5번가의 뉴요커들처럼 시크하고 세련되어져서가 아니다. 내가 정말 많이 아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파한 만큼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
뉴욕은 나를 정으로 두들겨 깎아내어 둥글둥글한 돌로 만들었다. 개성 없는 둥근 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안으로 함축한 단단한 돌이다. 그 돌로 뉴욕의 거리거리에 나를 새긴다. 크건 작건 나는 뉴요커로서 뉴욕의 얼굴을 만들어가는 한 획이다.
-「책머리에」에서



일상을 예술화하는 한 아티스트의 단단하고 특별한 이야기들
“나의 내면에서 말하는 일, 내가 그것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일”


저자는 뉴욕에서 한국화 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마저도 그 힘겨움을 즐긴다. 『뉴욕의 속살』은 뉴욕에서 15년간 한국화를 그리며 뉴요커로서 살면서 오감으로 체득한 뉴욕과 뉴요커의 흥미로운 진면목을 생생하게 담아낸 책이다.
1부 ‘뉴욕이 말했다’에서는 창조적 에너지가 넘치는 뉴욕과 뉴요커, 뉴욕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전한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조화를 이루어 또 하나의 색깔을 형성하는 동네 윌리엄스버그에 대한 예찬부터 가장 미국적이라 할 패션 브랜드 래그앤본을 창립한 마커스의 이야기, 네잎클로버를 사랑하는 특별한 아티스트 레슬리, 자신이 자라난 뿌리를 잊지 않고 오늘의 순간을 기록하려 애쓰는 뉴요커 타티아나가 말하는 행복, 뉴욕 아트 딜러의 매력을 몸소 설명한 전문가 토머스, 그리고 뉴욕이 사랑하고 뉴욕을 사랑한 아티스트 애그니스 마틴과 솔 르윗, 리처드 세라까지 모든 ‘뉴욕적’이라 할 이야기를 전한다.
2부 ‘나는 뉴욕 아티스트다’에서는 뉴욕에서 한국화가로 살아가는 저자의 일상이 펼쳐진다. 뉴욕에서 한국화 하기의 고역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뉴욕을 물들이는 다채로운 풍경 가운데 한 획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아티스트의 나날이 진진하다. 한국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던 학생으로서 한자와 씨름하던 이가 뉴욕에서는 유명한 화가들의 이름을 알지 못해 고군분투했던 일화부터 동양화의 ‘무위’의 철학을 뉴욕의 미니멀리즘 화가의 작품세계로 환원하는 미적 통찰까지 그 경험과 사유가 흥미롭다. 처음 한국화 수업을 진행했던 예술의 최전선 퀸스뮤지엄의 다재다능한 친구들의 이야기, 초짜 뉴욕 아티스트로서 끓어오르는 열정을 토해냈던 롱아일랜드시티의 작업실 풍경과 거기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예술이라는 한 열정의 공동체를 되새김한다.
3부 ‘모든 날의 뉴욕’에서는 자신만의 고유한 뉴욕 생활을 소개한다. 뉴요커로서 오랫동안 간직한 뉴욕을 풀어놓는다. 한 아이의 엄마기도 한 저자가 아이를 키우며 비로소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고백한 브루클린판 육아 일기, 언제나 저자를 위로하고 행복하게 하는 아주 사소한 것과 장소들에 대한 애정, 자신만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다양한 뉴욕 사람들의 꿈의 풍경들을 소개함으로써 이 뉴욕을 만들어가는 열띤 행복의 정체를 밝힌다. 100명의 뉴요커가 있다면 100가지 뉴욕이 있는 것처럼, 뉴요커에겐 각자의 뉴욕이 있고 각자의 일상이 있고 또 각자의 예술이 있는 법이라는 저자의 말이 단단하고 특별한 목소리임을 느끼게 한다. 


목이 유난히 긴 드립용 주전자를 든 바리스타의 하얀 손은 템포에 맞추어 춤추듯 능란하게 움직인다. 예술이 뭐 따로 있나!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며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다.
-241쪽



모든 날의 뉴욕을 관통하는 삶의 순간들
“사랑하지 않는다면 창조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조화들이다”


짧은 여행이 아닌, 오랜 시간 뉴욕에 살면서 저자가 마음을 주었던 장소와 뉴요커들의 일상과 태도, 아티스트의 이야기로 가득한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뉴욕이라는 도시가 주는 매력의 실체와 그 안에서 현재의 인생을 즐기고 누리며 살아가는 뉴요커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다시금 마주하게 된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창조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조화들”이란 뉴욕이라는 거대한 매력을 음미한 저자가 매혹된 삶의 순간들이기도 하다. “그만큼의 다양성이 뉴욕이 가지고 있는 무한 매력이고, 천의 얼굴”이라고 말하는 저자가 온전히 사랑한 시간들, 행복을 유보하지 않는 열정의 한 풍경이다. “미래 지향적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에 대한 뉴욕식 통찰이 그래서 지금의 우리에게 더 뜻깊다. 


아이를 키우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것은 행복지수다. 살면서 나 자신의 행복지수에 대해 큰 가치를 둔 기억은 별로 없다. 대신 목표를 위해 무섭게 몰두해왔다. 서울대를 가는 게 목표였고, 미국으로 유학 가는 게 목표였다. 첼시에서 전시를 하는 것이 목표였고, 좋은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작은 욕구들을 외면하기도 했고, 무언가를 희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뚤어지거나 비열한 방법을 취한 적 없고, 내가 삶을 잘못 살았다고 후회한다거나 개탄하지도 않는다. 지금에 와서 순간순간 행복해야겠다고 절규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이 한편으로는 익숙하다. 하지만 하늘이는, 내 딸아이는 자신이 행복한 것에 대해 좀 더 인지하면서 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의 그런 마음을 일깨워준 것은 인터뷰를 하며 만난 뉴욕의 ‘사람’들이다. 미국인에게 인생의 지표에 대해 물으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한다. 남이 원하는 나의 모습 말고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 그럼으로써 나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당장 무엇을 할지, 어떻게 살지를 결정하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일률적인 틀의 미래 지향적 행복을 위해 현재의 과도한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202~20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