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영화적 카멜레온” 이안 

그가 말하는 영화 창작의 비밀

 

“다재다능한” “장르를 넘나드는” 등의 수식어가 붙는 이안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한 사람의 관심사가 이토록 넓으면서 동시에 깊을 수 있는지 놀라움을 자아낸다.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감독은 몇몇 있지만 이안만큼 상이한 국적과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면서도 고르게 완성도가 뛰어난 영화를 만든 감독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음식남녀>를 포함한 대만 가족드라마 삼부작, 영국의 제인 오스틴 원작 <센스 앤 센서빌리티>, 중국 무협 영화 <와호장룡>, 미국 서부를 배경으로 한 <브로크백 마운틴>, 마블 코믹스 원작 <헐크>, 중국 스파이 멜로 <색, 계>, 인도 소년의 망망대해 표류기 <라이프 오브 파이>까지. 올해 2019년 개봉 예정인 <제미니 맨(Gemini Man)>에서는 미국의 유명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 배우 윌 스미스와 손잡고 SF 액션 장르에 도전한다. 이렇게 왕성한 창작의 비밀을 묻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이안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과 욕구는 인종과 문화, 시대를 초월해서 동일합니다. 바로 그것이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영화들을 만드는 게 허용되는 이유입니다”라고 밝힌다. 

『이안』은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시리즈 열한 번째 책이다. 1994년부터 2019년까지 진행된 총 스무 번의 인터뷰를 엮었다. 이안은 자신의 성장 배경과 삶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영화적 화두와 창작 방법을 솔직하게 풀어놓는다. 대만의 명문 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의 권위에 주눅들고 맏아들인 자신을 향한 기대에 부담을 느꼈던 성장기,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연극, 영화에 발을 들였던 경험, 영화를 배우러 유학한 미국에서 문화적 아웃사이더로 적응하는 데 애를 먹으면서도 끝내 감독으로 데뷔한 일화를 들려준다. 억압적인 가정 분위기에 억눌린 채 자라 많은 경험을 하지 못해서 다양한 영화를 만들고, 다양한 장소에 가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이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보는 능력을 주었다고 하는 부분에선 문화적 경계를 자유롭게 이동하는 그의 창작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영화적 화두뿐 아니라 제작 현장에서 촬영감독 등의 스태프와 어떤 방식으로 협업하는지, 국내에서도 유명한 양조위, 탕웨이, 케이트 윈즐릿, 에마 톰슨, 휴 그랜트 같은 쟁쟁한 배우들과 연기에 관해 어떻게 소통했는지 자세히 알려준다. 데뷔작 <쿵후 선생>에서 인연을 맺고 영화를 만드는 평생의 동지가 된 제작자 제임스 샤머스, 테드 호프와의 일화도 흥미를 더한다. 


“나는 나를 열망하는 영화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영화 연출을, 모든 장르와 인간 유형을 탐구하고픈 호기심을 느낍니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에서처럼 영국인들은 특정한 작업 방식이 있습니다. 홍콩의 무술감독과 가장 뛰어난 영화감독에게는 배울 만한 무엇인가가 늘 있습니다. 웨스턴을 만들 때는 말을 타고 권총을 가진 사내들이 있습니다. 나를 매혹시키는 무엇인가가 늘 있습니다.”

─250쪽

 

 

가족사와 성장담의 고백

아웃사이더를 향한 애정을 영화에 담다

 

문화적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든 이안. 뜻밖에도, 필모그래피에서 연상되는 자유로운 성향과 정반대였던 성장기를 내밀하게 고백한다. 조부모가 중국 공산당에 처형당해 혼자 대만으로 온 아버지가 이안을 낳고, 그에게 걸었던 크나큰 기대 때문에 진정한 자아를 대면할 수 없었다는 것. 예술을 멀리했던 학자 집안의 분위기와 당시 대만에 만연한 가부장제 문화에 눌려 항상 조용했고, 스스로 표현하기를 “가장 멍한 아이”였다고 하는 그는 연극과 영화를 접하면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이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으로 영화 유학을 떠나고, 미국 문화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지만 끝내 영화감독으로 성공한다. 성장기에 겪었던 갈등과 이방인으로 살았던 경험은 그가 연출한 작품들의 캐릭터와 드라마에 잘 녹아있다. 

<결혼 피로연>(1993)에서 손주 보기를 고대하는 부모님에게 게이임을 숨기고 위장결혼으로 위기를 벗어나려는 웨이퉁, 내면의 욕망을 감추고 살아가는 <와호장룡>(2000)의 무사들, 보수적인 미국 서부에서 성(性) 정체성을 숨기는 <브로크백 마운틴>(2005)의 카우보이, 억압적인 어머니 밑에서 성(性)적인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타이버가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연루되면서 자기 해방을 맞이하는 이야기 <테이킹 우드스탁>(2009)까지, 캐릭터의 면면은 다양하지만 관통하는 정서는 비슷하다. 이안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영화 속 아웃사이더 캐릭터에게 깊이 공감하면서 이들을 통해 보편적인 것을 찾아내려 시도했다고 전한다. 

부모 세대로 표현되는 전통과 갈등하는 캐릭터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명확하게 밝히는 이안은 상이한 입장에 선 캐릭터들을 사려 깊게 표현한다. 나아가 <아이스 스톰>(1997)에서는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무엇인지를 탐구하면서 세대 간의 조화를 꾀한다. 이렇듯 이안은 아웃사이더 캐릭터에 애정을 보내고 억압적인 관습에 도전하는 동시에, 캐릭터와 드라마를 깊이 있게 다루는 영화들로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23세 때 미국에 처음 온 경험이, (내가 떠나온 곳에 대해서는 더 이상 믿지 않지만) 미국에서 미국인이 아닌 존재가 된 경험이, 내가 이전에 그랬듯 앞으로도 평생 외부인이자 아웃사이더가 될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덕에 나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게, 솔직한(straight) 세상을 보는 게 대단히 쉬워졌습니다. 내 영화들에서 나는 늘 <라이드 위드 데블>의 토비 매과이어와 제프리 라이트 캐릭터 같은 아웃사이더들에게 동질감을 느낍니다. 더불어, 나는 사건의 실상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미국과 남북전쟁, 70년대는 우리가 들은 얘기 그대로가 아닙니다. 따라서 소재가 내 눈에 대단히 생생히 보이고,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며, 우리가 공공장소나 미디어에서 보는 것이 아니면 나는 그것을 대단히 흥미로운 시선으로 봅니다.”

─157쪽

 

 

스토리텔링에 뿌리내리고

영화 기술의 한계에 도전하다

 

내가 만드는 종류의 영화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드라마입니다. 내 영화들은 인간적인 존재에 대한 영화여야 합니다. 인간의 얼굴보다 관객의 관심을 더 오래 붙들어두는 것은 없고, 관객이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대상도 없습니다. 스토리텔링과 드라마, 인간의 얼굴 이 모든 게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의 핵심을 이룹니다. 나는 앞서 만든 영화들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서, 비주얼에 더 신경 쓰면서 영화를 만들고 또 만듭니다. 앞선 작품들하고 차이 나는 것을 만드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당한 노력을 해야만 그런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캐릭터들과 관련돼야 합니다.

─215~216쪽


책에서 한 인터뷰어는 “작가·감독 이안처럼 캐릭터와 이야기의 활용법을 철저히 통달한 현대 영화감독은 드물다”고 언급한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이안은 자신이 중시하는 건 장르나 영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드라마임을 밝힌다. 장르보다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고 감응하는 소재가 먼저고, 그것이 요구하는 장르를 찾는다는 것. 촬영에 관해서도 그는 근사한 비주얼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영상이 캐릭터와 스토리를 추동해나가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고 말한다. 타고난 균형 감각을 가지고 소재와 드라마, 영화적 기술을 조율해 나갔던 제작 과정들에서 그의 영화를 향한 신념을 확인할 수 있다. 탄탄한 드라마를 창작하기 위해 다양한 시대와 사회 구조를 탐구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를테면 <테이킹 우드스탁> 촬영 때, 60년대의 히피들을 묘사하기 위해 배우, 엑스트라에게 당시 신문 기사와 글, 히피 용어 등을 정리한 “히피 핸드북”을 만들어 주고, 우드스탁 페스티벌 즈음의 정치, 문화적 분위기를 담은 영화, 다큐, 음악 등의 목록을 정해서 감상하게 했다. 나아가 히피들의 외모와 동작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연출하는 모습에서 이안의 학구적이고 완벽주의적 면모를 볼 수 있다. 제작 당시 최첨단 영상 기술을 도입했던 <헐크>(2003)와 <라이프 오브 파이>(2012)에서도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난다. CG 캐릭터인 헐크를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 감독 자신이 직접 모션 캡처 복장을 입고 헐크의 표정을 연기했던 일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호랑이 CG 캐릭터 제작과 실제 같은 ‘물’ 연출을 위해 고심했던 기억, 3D에 대한 도전까지 책에 담았다. <라이프 오브 파이>로 3D 기술을 성공적으로 다룬 이안은 이제 눈을 돌려 <빌리 린의 롱 하프타임 워크>부터 초당 120프레임이라는 새로운 영화 기술에 도전하고 있다. 이 기술을 도입한 최신작 <제미니 맨>은 올해 관객과 만날 준비가 한창이다. 스토리텔링에 뿌리를 내리고 영화 기술을 향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안이 스크린에 또 어떤 신세계를 펼쳐낼지 기대하며 지켜볼 일이다. 


작가·감독 이안처럼 캐릭터와 이야기의 활용법을 철저히 통달한 현대 영화감독은 드물다. 장편영화를 불과 일곱 편 만드는 동안, 그는 탄탄한 드라마를 창작하기 위해 무척이나 다양한 시대와 사회 구조를 탐구하는 능력을 가진 ‘영화적 카멜레온’으로 스스로 입지를 다졌다.

─1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