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박완서 작가의 맏딸 호원숙의 그리움 가득한 십여 년의 여행 기록


올해 1월 22일은 박완서 작가가 타계한 지 5년이 된 날이었다. 또한 올 9월 4일은 박완서 작가의 85세 생일이기도 하다. 생전은 물론 여전히 한국문학의 큰 산맥으로 자리하는 작가의 곁에는 맏딸 호원숙이 있다. 어머니의 육필원고를 직접 신문사나 출판사에 들고 나르던 딸은 어머니 문학 여정의 든든한 조력자로 함께했으며, 어머니가 타계한 뒤에는 아치울 노란집에서 “작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손님으로” 맞으며 어머니의 뜻과 작품세계를 기리는 데 여생을 쓰고 있다. 그렇게 어머니의 타계 뒤 더욱 깊이 ‘박완서의 딸’로 각인된 숙명 가운데, 박완서라는 문학적 대지에서 묵묵히 자신만의 꽃밭을 일구어가는 한 기품 있는 영혼의 산문을 마주할 수 있는 기쁨이 생겼다. 이미『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두 권의 산문집을 통해 “오랜만에 품위 있는 글과 마주했다는 뿌듯함”(이문재 시인)을 안긴 바 있던 호원숙.
『그리운 곳이 생겼다』는 호원숙이 2004년 어머니와 떠난 네팔 여행을 시작으로 어머니를 잃고 다녀온 이베리아, 발틱해 여행까지 지난 십여 년의 여행 기록을 엮은 산문집이다. 쉰 살이 넘어 온전히 홀로 떠난 여행에서는 능동적인 기쁨이, 어머니와 남편과 함께 떠난 여행에서는 알 수 없는 충만함이, 또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한 여정에서는 힘든 고비를 넘어 이제껏 잘 살아왔다는 동지애가, 어머니를 잃고 떠난 여행에서는 애도하는 인간의 경건한 모습이 펼쳐지며 뭉클함을 자아낸다.
지난 십여 년은 저자인 자신에게도 인생 여정 가운데 중요한 일들이 연이었던 시간이었다. 이 책은 그 충만한 기쁨과 극렬한 슬픔의 날들 가운데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사색하는, 큰 요구와 책임을 안고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이 털어놓는 소박하고도 단정한 인생 예찬이라 할 만한다.


나에게는 허황된 마음이 있었다. 쓰지도 않은 소설의 제목을 생각해본다든지 내지도 않은 시집의 서문을 머릿속으로 써본다든지 하는, 주로 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문학의 문 밖에서 마냥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 여행기로 말미암아 그렇게 그리운 곳이 생겼다. 그리워할 곳이 생겼으므로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이 나만의 만족이 아니고 빛났던 그 순간들이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게 된다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가슴에 그리움이 샘물처럼 고인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라고 쓰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도 그 축복을 나누어주었으면 한다. 아울러 어머니의 85세 생신에 이 책을 드리게 되어 기쁘고 감사하다.
-「책머리에」에서



“살면서 이런 순간이 또 올 수 있을까”
홀로 때론 함께 가는 여행, 생생히 펼쳐지는 사려 깊은 인생 여정


이 책은 여행을 통한 한 영혼의 사려 깊은 인생 여정기라 할 수 있다. 늘 그 자리에 남아 엄마, 아내, 딸, 며느리의 소임을 다하던 작가가 누군가를 배웅하고 마중하던 이에서 벗어나 오롯이 떠날 수 있는 자유를 확보하기까지 거쳤던 시간에 대한 애틋함을 발견하며 이 여행을 응원하게 만든다.  


만 50년을 살았는데 아직도 마음이 설레고 아직도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더 훌륭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나. 나를 낳아주신 엄마, 나를 무조건 사랑하셨던 아버지, 그리고 먼저 간 그리운 동생, 나의 짝에게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정글의 밤공기는 신비로워 모든 기억들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39쪽에서


“또 하나의 눈”을 뜬 네팔 여행 이후, 백두산 천지 여행에서도 동기들과 떠났던 크루즈 여행에서도 홀로 떠난 유럽여행에서도 과거의 시간을 긍정하며 앞으로의 새로운 나를 꿈꾼다. 인생의 초반기를 잘 가꾸고 선물처럼 건네받은 이 시간들은 여행의 행위를 통해 더욱 풍성한 여정이 된다.


드디어 울음이 터진다. 인생길도 이 돌밭처럼 지루하고 재미없고 힘들게만 이어진다면. 문득 그럴지도 몰라. 스스로에게 묻는다. 네 인생에 무얼 그리 힘들게 살아보았니?
-256쪽에서


1부 「또 하나의 눈을 뜨다」에서는 첫 여행 네팔에서의 새로운 경험, 백두산 천지를 마침내 눈앞에 마주하고 느낀 감동, 바이칼의 아름다운 풍광 앞에서 잃어버린 카메라를 통해 깨달은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2부 「엄마와 밤기차를」에서는 홀로 패키지여행으로 갔던 유럽의 자유로운 모습들, 어머니와 함께 떠난 루마니아, 불가리아, 벨기에, 네덜란드의 온화한 발걸음들을 추억한다. 3부 「능동적인 기쁨」에서는 어쩌다 혼자 떠났던 뉴질랜드에서 맞닥뜨린 광활한 자연과 어머니의 책을 번역했던 엡스타인 교수 가족과의 시간들 속에서 엄마의 소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대학생의 나를 떠올린다. 또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크루즈 여행은 말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경험케 한다. 모범생들이었던 그녀들의 현재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생의 고락을 함께해온 동지로서 애틋함을 맛본다. 4부 「그리운 곳이 생겼다」에서는 몽골의 끝없는 돌밭길을 걸으며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는 여정이 펼쳐진다. 그리고 엄마를 잃고 떠난 이베리아와 발틱해의 여정 속에서 어머니를 애도하고 그 애도 가운데 스스로의 인생을 단단하게 여민다.



“나는 엄마도 그립고 그 책을 읽었던 그 시간도 그리웠다”
기품 있는 한 영혼의 헤아림, 85세 어머니 생일에 바치는 책


『그리운 곳이 생겼다』는 저자의 여행기인 동시에 대작가였던 박완서를 엄마로 둔 딸이 엄마와 함께한 모녀의 다정한 시간 여행으로도 읽힌다. 어느 날 루마니아의 밤기차를 엄마와 타고 내린 밤, 엄마의 고백은 딸의 마음에 슬픔을 안긴다.


수체아바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멀리 왔고 곤고하기 때문일까. 어머니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내가 박경리 선생 돌아가시고 얼마나 허전한지 아니” 하신다. 그분의 장례 기간 동안 장례위원장이라는 생전 연습해보지도 않은 일을 잘 치른 어머니다. 원주에서 감자나 김치를 가져가라는 전화를 받으면 기꺼이 달려가던 어머니다. 돌보아줄 웃어른이 없다는 것, 마음이 저리다.
-166쪽에서


함께한 바이칼 여행에서 수천 장의 사진을 찍으며 애지중지했던 카메라를 잃어버린 딸이 징징거리자 어머니가 한 말은 여느 어머니와 같지만 그 자체로 울림을 준다.


그때 어머니의 준엄한 음성이 들린다. “응석 부리지 마라. 더 좋은 걸로 또 사면 되지.”
-103쪽에서


고등학교 시절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권하던 어머니를 둔 저자가 어머니를 잃고 들렀던 도스토옙스키의 집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나는 비가 추적추적 오는 창가를 내다보며 엄마는 여기 와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김윤식 선생님은 페테르부르크에 어머니와 같이 오셨다고 사진을 보여주셨다. 두 분은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하셨을까? 뜻도 없이 엄마를 불러본다. 마치 엄마의 아주 오래된 연인을 찾아온 것 같다.
-313~314쪽에서


네팔의 꽃밭을 어머니와 걸으며 아치울의 꽃밭을 떠올리던 기억, 루마니아의 아침이 밝기 전 밥 짓는 연기 나던 동네를 일없이 산책하던 기억, 바이칼의 호수로 향하며 듣던 시 한 편의 기억. 이제는 모두 돌아갈 수 없는 풍경이지만 그 기억을 간직할 수 있어서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이 헛되지 않다는 기품 있는 영혼의 고백은 그 자체로 뜻깊다. 그리운 때, 그리운 곳, 그리운 사람이 있고 그 그리움을 묵직하게 펼쳐내는 호원숙의 이 원숙한 산문집으로 말미암아 더욱 그러하다.


이제 비아의 여행은 끝나갑니다. 인생의 여정을 마친 엄마를 뜻도 없이 불러봅니다.
-317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