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주의적 기독교에 싫증난 미국인 사회학자
신 없이도 행복한 사회 스칸디나비아를 들여다보다

 

미국인 사회학자 필 주커먼은 비종교적인 사회를 연구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자료 조사 결과 그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비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문제없이’ 사회 공동체를 꾸려간다는 잠정적 결론을 얻고 이를 실증적으로 알아보고자 덴마크로 떠난다. 14개월 동안 생활하며 150여 명을 심층적으로 인터뷰한 주커먼은 북유럽 사회가 종교성 없이도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경제적으로 문제없이, 오히려 종교성이 충만한 미국 사회보다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목도한다. 주커먼은 자신의 경험담과 인터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종교성에 관한 사회학적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며, 초월적 세계에 의지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일련의 이론들을 반박하려 한다. 저자가 계속해서 강조하듯이, 이 책의 목적은 종교성이 없는 사회가 더 행복하게 잘 산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종교성이 약해도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위험한 사회가 도래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 도덕적이고 풍요로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음을 사례를 들어 보여주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자신이 스칸디나비아에서 1년여 동안 생활한 것은 “세속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신 것”과 같았다고.
 

『종교, 심층을 보다』와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는 『신 없는 사회』가 평소 맹목적인 표층 종교를 비판해온 자신의 논지를 뒷받침한다며 출간을 환영했다. 맹목적인 신앙을 비판하고 종교의 본래적 의미를 되물으며, 한국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조명해줄 책이라는 것이다.

  

 

실존, 그 자체에 충실한 사람들

 

『신 없는 사회』는 주커먼이 실시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종교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은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죽음을 마주하며 초월적 존재를 현실적 존재로 만드는지 기록한다. 실증적 자료에만 의존하는 사회학자답게 주커먼은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가령 신이 없는 사회만이 행복하다든지, 신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회는 불행하다든지 하는 인과적인 결론은 이 책의 관심 밖이다. 또한 개별 인터뷰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신 없는 사회』를 통해 이들의 생활을 일반화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 하지만 인터뷰 대상자들이 삶과 죽음 등 인간의 인생을 이야기하며 공통적으로 보인 태도를 세 가지로 정리해볼 수는 있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것만 믿는 ‘합리적인 회의주의자’이며, 이상향을 따로 설정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한 ‘이상적인 세속주의자’이고, 이러한 이상적 현실을 만들기 위해 함께 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애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인주의자’들이다.

 

 

 — 합리적인 회의주의자

 

이들은 초월적인 존재가 우주를 창조했다는 식의 창조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다윈 이후의 진화론이 인간의 생명과 우주의 탄생을 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믿으려면 직접 경험해봐야죠”라거나 “믿고 싶어요. 하지만 이성은 그런 존재가 없다고 말하죠”라는 식의 대답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대답이다. 이런 합리주의적 태도는 죽음관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현세는 죄악으로 가득 찬 지옥이고 내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뿌리 내리지 못한다. 이들은 죽음을 자연현상으로 차분하게 받아들이며 그 이후의 일은 상상하지 않는다. 감지하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고 믿으며 위안을 찾는 행위는 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또 뭐? 그 다음에는 뭐가 있지?’ 하고 말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나는 (…) 행복하게 사는 것, 아니 불행한 삶이라 해도 삶은 삶이오. (…) 사는 이유를 말한다면 죽는 거라고 말하는 거지. 천국에 가는 건 나한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옌스)

 

“절대로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티나)

 

“우리의 존재가 끝나는 거죠. 그것뿐이에요.”(이사크)

 

“내 몸이 분해돼서 자연의 자연스러운 순환의 일부가 될 겁니다.”(마스)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종교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죽음이 다가올수록 두려워하며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일하는 안네는 기독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에서 천국에 가지 못할까 걱정하며 자신의 인생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죽음 이후에 대한 상상이 이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이다. 주커먼이 만난 대다수의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다른 모든 생명체처럼 인간의 삶도 죽음과 함께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겼고 그에 따라 현재의 삶에 충실했다.

 

 

— 이상적인 세속주의자

 

합리적인 회의주의자의 태도는 사람들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며 이들이 지금, 여기를 마음껏 누리도록 한다. 주커먼은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인간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사람들에게 질문한다.

 

“내 경우에는 삶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나는 게 확실해요. 인생의 의미? 나는 지상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을 누렸어요. 그 시간을 최대한 잘 보내는 것이 나의 의무죠. (…) 정말이지 훌륭한 세월을 보냈어요.”(라르스)

 

“삶의 의미라는 건 그냥 나와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 같은데.”(요나스)

 

“의미야 사방에 있죠. (…) 자신의 의미는 자기가 만들어내는 거죠……. 그걸 할 수 없다면 먼저 자기 인생을 정비해야 할 거예요.”(티나)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뭐가 됐든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고 (…).”(셰르스틴)

 

“내게 묻는다면 생이 즐거웠다고 말하겠어요. (…) 원칙적으로 삶은 모두가 받은 기분 좋은 선물.”(이사크)

 

이들은 삶의 궁극적인 의미 같은 것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이들과 대화하며 주커먼은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를 ‘아는 것’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사색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이 종교를 지탱하는 원동력이라는 몇몇 주장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이다.

 

 

— 공동체를 지향하는 개인주의자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의미 부여하기를 꺼려하는 회의주의적이고 세속주의적인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냉담하거나 무심하지 않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사회복지 시설이 말해주듯이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의 사회 참여율은 아주 높은 편이다. 초월적인 존재가 두려워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도덕과 윤리를 따르는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삶의 궁극적인 의미라는 것은 한 개인의 존재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다.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의 삶을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투영하며 모두가 연약한 존재라는 공동체 의식 속에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는 생활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는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생활 윤리로 다가온다.

 

“기독교나 다른 종교에 보면,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는 법 같은 것에 대해서 정말 좋은 말들이 있잖아요. (…) 살아가는 데 유용한 훌륭한 규칙들이 그 안에 있기는 해요.”(레네)

 

“내가 종교를 믿지 않아도 내 가치관이 전부 종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게 중요해요.”(소니)

 

“난 하느님을 믿지 않아요. 하지만 난 교회를 계속 지키고 싶어요. (…) 난 그게 덴마크 문화의 일부라고 생각해요.”(기테)

 

 

“편안한 백지상태”
세속주의자들의 종교관

  

주커먼은 이런 스칸디나비아인들의 태도에 ‘세속주의’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이 ‘세속적’이라는 말에 사회학적인 이론을 적용해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려 한다. 그는 종교와 종교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반면, 세속주의와 세속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 못한 추세를 지적하며 이 때문에라도 사회학적인 시선으로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연구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같은 이들처럼 세속성이 종교성보다 낫다고 논쟁적으로 옹호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들이 세속주의적인 삶과 세속주의적인 사람들 자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연구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주커먼의 사례 연구는 세속주의적인 문화 속에서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생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세속주의적인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닐까? 주커먼은 이들의 태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꺼림/삼감’의 태도인데 대체로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한다는 것이다. 이는 종교가 내밀한 주제라 말하기를 꺼린다기보다, 주커먼이 일컫듯 이들이 “편안한 백지상태”여서 종교에 대해 할 말이 없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종교에 대해 숙고할 때가 드물고 주변 사람들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더욱 드물기 때문에 누군가와 이와 관련한 대화를 나눌 “이야기적 구조Narrative Structure”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온화한 무관심’의 태도로,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교회를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생각하면서도 종교를 믿지는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인터뷰 대상들 가운데 많은 경우가 이런 태도를 보였다. 세 번째는 ‘철저한 무관심’의 태도로, 지금까지 살면서 종교, 혹은 신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들을 말한다. 주커먼이 인터뷰를 시도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은 “하느님을 믿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대답하지 못한 채 생각에 잠겼다. 한참 후 내놓은 대답은 “생각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는 식이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인터뷰 자리에서 내렸다.

 

 

공동체의 기념물
종교는 문화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세속주의자가 되었을까? 덴마크인들은 키르케고르의 후예들이다. 키르케고르가 살았던 19세기를 짐작해보면 루터교의 영향이 강했으며, 그 역시 그러한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키르케고르의 실존적 갈등은 당대의 강력한 종교적 힘 없이는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커먼이 주목하듯이 인터뷰 대상들의 내력을 살펴보아도 지금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의 조부모 세대 이상에서는 국교회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모 세대, 자신들의 세대, 자식들의 세대로 올수록 그 힘은 서서히 약해졌다. 이는 비단 북유럽뿐 아니라 종교개혁이 처음 일어났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힘이 강했던 유럽 국가에서는 대체로 맥을 같이하며 나타나는 현상이다. 주커먼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이 역시 최선을 다한 설명일 뿐 확실한 인과관계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전제한다.
  

첫째, 덴마크와 스웨덴에서 루터교는 국교회다. 이렇게 종교 조직이 하나뿐일 경우 “게으른 독점”의 모습이 나타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자신들의 종교를 홍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종교에 흥미를 잃게 되고 자연스럽게 종교성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다양한 종교들이 경쟁하는 사회의 대표격인 미국과 비교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둘째,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가 안전하다고 느낄수록 종교와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덴마크와 스웨덴을 예로 보아도, 이들 나라가 극심하게 빈곤했던 시기인 19세기에는 종교의 세력이 막강했다. 하지만 지금 덴마크와 스웨덴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지역 국가들 대부분은 부유하고 사회복지가 잘 마련된 나라에 속한다. 셋째,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질수록, 그럼으로써 종교 생활에서 멀어질수록 그 여성들의 남편과 자녀 역시 종교에서 멀어진다고 설명할 수 있다. 사회에서 임금노동을 하는 여성들이 전업주부로 일하는 여성들보다 덜 종교적이며 이런 사실이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오늘날 덴마크와 스웨덴 여성 대다수, 특히 덴마크의 경우 여성들의 80퍼센트 가까이 가정 밖에서 임금노동을 한다는 통계는 이런 상관관계를 뒷받침한다. 그 밖에도 미국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동질적인 스칸디나비아 사회에서는 굳이 종교를 통해 공동체를 구성하고 소속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해석도 주목할 만하다. 또한 높은 교육 수준, 사회민주당의 강세 등의 사실도 종교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그 이유를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세속적인 사회에서 신실한 신앙심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성을 쉽게 내보이지 못한다. 이들은 자신이 초월적 존재를 믿는다는 사실을 커밍아웃하듯이 친한 사람들에게 고백한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람들이 대체로 종교 자체에 대해선 관용적이지만, 실제로 현실 너머를 믿고 추구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만날 경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 미국인의 눈에는 더욱 신기하게 비치는 사회를 두고 주커먼은 ‘문화적 종교’라는 이름을 붙인다. 종교 사회학자 N. J. 디머래스가 2000년에야 정리한 개념인 ‘문화적 종교’는 종교적 전통에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그 종교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믿는 사람들의 비율이 극히 낮은 경우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성경의 말을 문자 그대로, 즉 신이 이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을 수는 없는 사람들의 태도를 가리킨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인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믿음을 거부하는 경우 이들은 종교를 현실화된 문화로 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예수가 신의 인간화임을 믿지 못하며 성모 마리아의 동정녀 출산을 믿지 않는다. 다만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따르고 교회 건축물이 보여주는 인간 문화의 경이로움에 감탄하며 이를 자신들의 생활로 받아들여 종교의 가치관이 자연스레 삶이 되었을 뿐이다. 이들에게 신의 존재 유무와 천국과 지옥의 실재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종교는 이들에게 “공동체의 기념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종교를 다시 생각하다  

 

덴마크에서 인터뷰 대상이었던 모르텐은 6개월 정도 미국 사회를 경험한 다음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던 덴마크에서의 인터뷰 내용을 철회한다. 미국 사회의 종교성과 신앙심을 기준으로, 그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면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르텐의 말은, 주커먼에게 자신은 신을 믿는다고 말한 많지 않은 인터뷰 대상들의 경우 미국 사회의 기준으로는 엄밀히 말해 신앙인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모르텐은 말한다, “우리 덴마크인들은 미국이 우리한테 전쟁에 같이 나가자고 권유(…)할 때 아주, 아주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거야. 미국에서는 광신도들이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갖고 있으니까. 내가 보기에 덴마크인들은 이 점을 모르는 것 같아.” 덴마크에서는 신앙인이었던 그가 미국 사회를 경험한 다음엔 자신을 “불가지론자, 어쩌면 무신론자”로 규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모르텐의 태도는 종교 지향적 정체성과 세속주의적 정체성이 사회적 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초월적인 존재에 의지하려는 종교적 성향이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이다. 

 

1년여 동안 스칸디나비아의 세속적 공기를 들이마신 주커먼은 자신이 살아온 미국 사회를 떠올리며 되묻는다. 한 “사회의 도덕성과 종교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구성원들이 성경을 많이 사랑하는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빈곤을 사실상 퇴치한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많은 구성원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회가 윤리적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어린이와 노인, 고아의 복지를 위해 (…) 전문적인 보살핌을 제공해주는 사회가 윤리적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신 없는 사회』는 어느 쪽(대표적으로 미국 사회와 스칸디나비아 사회)이 결과적으로 종교적 교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면서 미국 사회를 비롯해 몇몇 나라에 만연한 표층적 종교 근본주의를 비판할 근거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