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학교’에서 수련을 받고 희망을 노래하다
─이해인 수녀의 신작 시 100편


2010년 새해, 이해인 수녀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건넨다. 『희망은 깨어 있네』는 시인이 일상에서 길어 올린 100편의 신작 시, 그리고 지난 1년 반 동안 기록한 단상들을 모았다.


이해인 수녀는 지난 연말 인터뷰(<동아일보> 12월 4일자)를 통해 오랜만에 근황을 전했다. 암 수술 이후 방사선치료 28번, 항암치료 30번을 받았다는 그는, “오늘은 내 남은 생애의 첫날이라고 생각하며 지낸다”라고 담담히 이야기했다. 또 “아프고 나서 감사할 일이 더 많아졌다”면서 “삶 자체에 시를 쓰는 느낌으로 산다. 내면의 행복지수가 더 높아졌다”라고 밝혀, 환우들을 비롯한 이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었다.


신간 『희망은 깨어 있네』에는 그간의 심경과 깨달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해인 수녀는 1976년 첫 시집을 낸 이래 한결같이 작고 소박한 것들의 소중함을 말하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 행복을 찾아왔다. 이번 시집에도 그러한 감성과 생각은 살아 있는데, 투병을 하면서 정서의 결이 더욱 섬세해지고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힘겨운 시간을 보낸 시인은 이번 책을 펴내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자신이 ‘고통의 학교’에서 수련 받은 학생이며, 이 학교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고백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덮친 암이라는 파도를 타고 다녀온 ‘고통의 학교’에서 나는 새롭게 수련을 받고 나온 학생입니다. 세상을 좀 더 넓게 보는 여유, 힘든 중에도 남을 위로할 수 있는 여유,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 유머를 즐기는 여유, 천천히 생각할 줄 아는 여유, 사물을 건성으로 보지 않고 의미를 발견하며 보는 여유, 책을 단어 하나하나 음미하며 읽는 여유를 이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책머리에」에서


그리고 다시 부르는 희망! 절망의 끝을 엿본 사람이 희망을 말할 때, 그건 막연한 개념이 아니라 육화된 생명체와 다름없다. 시인은 말한다. 희망이란 잠들고 일어나고 옷을 입는 일상 속에 있다고. 그러나 결코 저절로 오지 않으며 부르고 깨워야 내 것이 된다고. 그의 시 한 편 한 편에서, 몸으로 깨달은 이치가 담뿍 묻어난다.


이번 시집에는 두 사진작가(김 마리 소피 수녀·박정훈)가 찍은 사진들을 함께 실었다. 단정하면서 자연의 빛이 살아 있는 사진들이, 눈을 맑게 하고 마음에 여유를 준다. 이해인 수녀의 시들을 더 깊이, 넓게 호흡하며 읽도록 이끈다.



인간적인, 진솔하고 따뜻한 시어들
─웃음 속에 숨은 아픔, 새롭게 피어나는 기쁨과 감사


시집은 총 여섯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장 <희망은 깨어 있네>는 일상의 짧은 한순간, 말 한마디 속에서도 희망과 기쁨을 발견하는 시인의 감성을 촘촘히 엮어낸다.


나는 / 늘 작아서 / 힘이 없는데 / 믿음이 부족해서 / 두려운데 / 그래도 괜찮다고 / 당신은 내게 말하는군요 //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 옆에 있는 사람들이 / 다 희망이라고 / 내게 다시 말해주는 /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 고맙습니다 // 그래서 / 오늘도 / 나는 숨을 쉽니다 / 힘든 일 있어도 / 노래를 부릅니다 / 자면서도 / 깨어 있습니다
─「희망은 깨어 있네」 전문


두 번째 장 <병상 일기>는 와병 중에 쓴 일기 같은 시들이다. 병상에서 느끼는 괴로움과 절망, 그 속에서 눈뜬 지혜와 감사의 마음이 잔잔하고도 애틋하게 다가온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 몸이 많이 아플 때 /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 어떤 경우에도 /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 고요히 나 자신만 / 들여다보기로 했다 /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 저만치서 행복이 / 웃으며 걸어왔다
─「어떤 결심」 전문


이어지는 <계절 편지>는 시인의 눈에 비친 자연 풍경과 사람살이에 대한 단상이다. 이 시들을 읽으면 일상에서 무심히 넘기기 쉬운 계절의 기운과 창밖 풍경에 다시금 눈길을 주게 된다. 네 번째 장 <채우고 싶은 것들>에서 시인은 수도자이자 생활인으로서 느끼는 그리움과 꿈, 행복에 대해 말한다.


<언제나 그리움>은 정든 벗과 존경하는 분을 떠나보내며 쓴 추모 시들로, 고(故) 장영희 교수, 김수환 추기경, 김점선 화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읽는 이들의 마음을 울린다.


장영희 김점선 이해인 / 셋이 다 암에 걸린 건 / 어쩌면 축복이라 말했던 점선 // 하늘나라에서도 / 나란히 한 반 하자더니 / 이제는 둘 다 떠나고 / 나만 남았네요 // 그대가 그려준 / 말도 웃고 / 꽃도 웃는 나의 방에서 / 문득 보고 싶은 마음에 / 눈을 감으면 / 히히 하고 웃는 / 그 음성이 / 당장이라도 / 들려올 것만 같네요
─「김점선에게」에서


마지막 장 <시를 꽃피운 생각들>에는 하루하루 일기처럼, 편지처럼 써내려간 글들을 골라 날짜순으로 실었다. 시어의 싹이 된 말들,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두려움과 기분 변화 등 갖가지 상념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순식간에 삶의 패턴이 달라져버리고 말았어요. 단편적인 꿈들을 나누어 꾸기도 하고, 분명 옆에 사람이 없는데 있는 것 같은 환영을 보기도 합니다. 내가 했던 수많은 약속들, 계획들…… 이젠 소용없게 되었네요.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 서운함, 슬픔, 실망을 주어 미안합니다. 며칠간 입 안이 타는 목마름을 경험하며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직은 두렵기만 하네요. 2008. 7. 25 (일부)


빨래를 하고 다림질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일상이 더욱 귀하게 여겨지는 요즘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새롭네요. 나의 꿈길에서는 역시 바다가 제일 많이 보여요. 반달이 뜬 하늘을 올려다보며 옥상에서 산책을 하는 저녁식사 후의 행복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2009. 8. 29


투병 중에도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놓지 않고,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 이해인 수녀. 그는 30여 년간 맑은 감성의 시어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자 수도자로서 그가 일궈온 삶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