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사전 한 글자 사전의 김소연 시인 신작 산문
어금니를 깨물며 타인과 일상을 버티는 힘과 사랑에 대하여

 

김소연 시인의 새로운 산문집 어금니 깨물기가 마음산책에서 출간되었다.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한 글자 사전 이후 마음산책에서 펴내는 김소연 시인의 신작 산문집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시기, ‘어금니를 깨물며’ 버텼던 날을 떠올리게 하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동안 마음산책에서 내온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들은 많은 사랑을 받았다. 마음의 수많은 갈래들을 살핀 마음사전과 ‘감’에서 ‘힝’까지 한 글자들로 삶을 가늠한 한 글자 사전은 사전 형식의 책으로 사랑을 받았고, 시옷의 세계 또한 ‘시옷(ㅅ)’으로 시작하는 낱말을 들여다보며 일상을 적어 내려간 산문집으로 많은 독자들을 만났다. 어금니 깨물기는 김소연 시인이 사전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본격적으로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는 산문집이다. ‘무능하지만 무해했던’ 아버지와 ‘같은 무능이었어도 유해했던’ 어머니를 나란히 비교하며 펼쳐지는 글은 한 개인의 내밀한 고백이 보편적인 가족 이야기로 확장되는 것을 보여준다. 독자적인 시 세계를 일궈온 시인이자 섬세하고 정확한 문장을 쓰는 에세이스트로서, 김소연 시인은 어금니 깨물기를 통해 다시 한번 그의 매혹적인 산문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할 예정이다.

 

 

“엄마는 엄마를 끝내고 
나의 자식이 되어 유리 벽 너머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와 딸에 대한 통찰과 빛나는 유년 시절의 기억

 

어금니 깨물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가족, 그중에서도 특히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시인의 통찰이다.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하되 늘 남자 형제보다는 물러서 있어야 하고, 자주 어머니의 감정 받이가 되는 한국사회 많은 딸들의 운명을, 김소연 시인은 담담하게 써 내려간다. 

 

나는 엄마를 오래 싫어했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를 착취하는 사람이었고, 오빠보다 뒤에 서 있기를 지나치게 종용해온 억압의 주체였다. 나는 자랑스러운 딸이어야 하되 오빠보다 더 자랑스러우면 안 되었다. 아주 좁은 영역 안에서 적당히 운신하는 법을 나는 일찌감치 체득했다. (…)
이제는 엄마를 싫어하지 않게 됐다. 화해를 한 것도 아니고, 용서를 한 것도 아닌 채로 저절로 그렇게 됐다. 
15쪽

 

‘엄마를 오래 싫어했다’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는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애증’일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미움을 토로하던 김소연 시인은, 어머니의 투병생활이 이어지며 그 미움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어느덧 돌봄의 주체가 뒤바뀐 상황을 인지하곤 ‘엄마는 엄마를 끝내고 나의 자식이 되었다’라는 인상적인 문장을 남긴다. 수많은 딸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을 어머니에 대한 애증은, 시인의 문장을 통해 보통의 감정으로 보듬어진다. 
김소연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고백을 한 축으로, 유년 시절의 기억들도 세세하게 소환한다. ‘뽑기’를 해 먹으려다가 국자를 태웠던 기억, 이발사 행세를 하려던 오빠에게 머리를 잘렸던 기억,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냈던 연애편지를 몰래 읽으며 부모님의 젊은 시절을 상상하던 기억…….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인의 글들을 읽다 보면, 한 시절에 대한 추억이 지니고 있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풍성하고 다채롭게 해주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또한 추억은 이야기로 남아 보석처럼 윤이 나는 돌멩이처럼 삶에서 오래도록 매만지게 되기도 한다.

 

생각이 짧았던 어린 시절의 많은 실수들은, 호기심은 왕성했으나 사고는 단순했고 현실은 예상을 빗나갔으나 대처 능력은 부재했기 때문에 빚어졌다. 단순했던 만큼, 간단하게 실수를 인정했고 명쾌하게 용서를 구했다. 벌을 받든 이해를 받든, 받을 것을 받았다. 후회를 하든, 반성을 하든, 할 것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실수가 빚어낸 이야기 하나가 미담으로 서서히 변신할 수 있었다. 자꾸 매만져 보석처럼 윤이 나는 돌멩이처럼 반짝거리는 추억이 될 수 있었다. 95~96쪽

 

 

무릎을 감싼 채 웅크리고 앉은 아이가 
자기 심장만을 바라보며 시를 썼던 시절,
시인과 시 쓰기에 대한 겹겹의 단상

 

첫 시집을 내기까지 웅크리고 앉아 시를 썼던 아이는 어느덧 여러 권의 시집을 내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시인이 되었다. 김소연 시인의 시와 시 쓰기에 대한 지극한 애정은 산문집 곳곳에서 드러난다. 다른 시인의 시집들을 읽으며 “한 개인이 자기 방식으로 입을 열어 자기 어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간 세계”라고 표현하고, 시 쓰기의 고단함과 환희 또한 은은하고 나직하게 이야기한다. 특히 3부에 단독으로 실린 글 「덧없는 환희」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외국 시인들을 한 명씩 호명하다가 폴란드의 시인 쉼보르스카를 끌어오는 대목도 주목할 만하다. 그를 두고 “시인의 위대함이 아니라 사람의 위대함을 완성해갔다”라고 깊은 애정을 드러낸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쉼보르스카의 언어들이, 한국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하는 과정은 자못 흥미롭기도 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런 질감의 말을 걸어와주기를 고대하며 사는 것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질감의 대화를 나누지 않는 한, 숱하게 사람을 만나고 숱하게 대화를 해도 외로움은 더해지기만 한다는 것은 나만이 느끼는 허기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쉼보르스카와 대화를 하고 싶어 시집을 펼친다. 130쪽

 

늘 언어를 예민하게 다루는 시인만이 써 내려갈 수 있는 산문의 문장들이 있다. 또한 시와 산문은 그 어법이 분명 다르지만, 읽다 보면 시인의 산문은 마침내 ‘시’를 향해 가는 또 다른 여정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시인과 글쓰기에 대해 각별해지고, 언어 앞에서 겸허해지는 고요한 경험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