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와 여배우 진 세버그의 사랑 실화
‘신화적 사랑’으로 윤색된 그들 관계의 시작과 끝
전기문학의 섬세한 매크로렌즈로 왜곡 없이 뒤좇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수훈을 세워 레지옹 도뇌를 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 로맹 가리. 샤를 드골의 오른팔로 미국, 페루, 볼리비아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외교관 로맹 가리. 에밀 아자르 등 다섯 개의 필명으로 글을 써 ‘한 작가에게 결코 두 번 상을 주지 않는다’는 공쿠르상을 재차 수상한 유일한 작가 로맹 가리. 그에게는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 진 세버그와의 사랑 이야기가 늘 따라붙는다. 또한 권총 자살로 최후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늘 따라붙는다. 이 작가의 삶에 과연 어떤 애수가 있었던 걸까.
연인이자 아내 진 세버그의 삶에서도 행복은 그저 바람처럼 스치어 갔다. 1956년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열린 영화 <성녀 잔 다르크>의 공개 오디션에서 숱한 매체들의 주목을 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한 진 세버그.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네 멋대로 해라>에서 뛰어난 연기와 독보적인 패션 스타일을 선보여 시대의 아이콘으로 남은 진 세버그. 그러나 진보적 성향으로 FBI의 감시와 미국 대중의 비난을 받던 진 세버그는 수차례의 입원과 자살 시도 끝에 로맹 가리의 자살보다 1년 앞선 1979년 9월, 파리 근교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 마흔하나, 공식 발표된 사인은 약물 과용. 정말 자살인지 여부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뛰어난 작가와 세기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배우, 24년의 나이 차와 사회적 비난—그들의 시작은 불륜이었다—을 무릅쓰고 끝내 자살로 진정성을 피력한 두 사람의 격정적인 사랑, 이것이 우리가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를 함께 떠올릴 때 사용하기 쉬운 수식어다. 이들의 사랑은 너무도 유명해서 오히려 간략하다. 하지만 미사여구로 수식한들 죽음을 불사한 두 사람의 애증의 일대기를 몇 개의 단어로, 몇 마디 문장으로 함축하고 기억하는 일이 과연 옳을까? 누군가의 인생을 키워드에 가두는 일이 정당할까? 아니, 그 전에 두 사람은 정말로 사랑 때문에 죽었을까? 두 사람의 인생 앞에서 누구도 이 물음에 답하지 않았고 답하지 못했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는 살아생전 느끼고 아파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좋은 화젯거리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그 둘의 삶과 사랑은 판타지로 남았다.
이 책은 그간 호사가들과 대중의 판타지로 변질된, 또는 사회 관습과 외면으로 처량하게 유린된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삶 그리고 사랑을 진실하게 접사한 첫 책이다. 두 개의 삶이 어떤 과정으로 원숙해져 어떻게 씨실과 날실로 엮이고 사랑이라는 거대한 교점을 찍는지, 저자 폴 세르주 카콩은 역사가의 시선, 문학가의 문장으로 머리 깊이 각인될 입체상을 다듬는다. 로맹 가리의 삶과 진 세버그의 삶 각각의 태동과 소멸, 그리고 그 뒷이야기를 교차 서술한 이 전기는 흡사 글로 찍은 영화이기도 하며 잘 구성한 팩션(faction)이기도 하다. 사실만으로 빚어낸 이 전기의 역동성의 기원은 바로 지면에 가감 없이 옮긴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삶 자체다. 그만큼 두 사람은 문학처럼, 영화처럼 살다 갔다. 그들의 삶을 비허구적으로 그리면서도 문학적 흥미를 잃지 않는 건 바로 그 때문이다. 평생 대상화되기를 거부했지만 여전히 흥미롭기에, 솔직하게 그려낼수록 허구처럼 느껴지기에 그들의 삶이 다시 한 번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이벤트’이기를 거부한 사랑, 그 사랑을 오롯이 옮긴 단 한 권의 책

 

로맹 가리에게 진 세버그는 유일한 사랑이 아니었다. 쟁취할 수 없었기에 불멸로 남은 헝가리 여인 로나도 있었고, 로맹 가리가 작가로서 더욱 성장하게 도와준 열한 살 연상의 본처 레슬리 블랜치도 있었다. 또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곁에 남은 여인은 카사블랑카 출신의 이혼녀 레일라 셀라비였다. 물론 이것은 그의 여성 편력의 일부일 뿐이다.
진 세버그에게도 로맹 가리가 유일한 사랑은 아니었다. 로맹 가리와 사랑에 빠지던 때 그녀는 이미 프랑스인 국제 변호사 프랑수아 모뢰이와 부부였고, 로맹 가리와 시들해질 즈음에는 영화 촬영으로 만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염문을 뿌려 결국 로맹 가리와의 이별에 실마리를 마련했다. 그 뒤에도 그녀는 수차례의 크고 작은 연애를 했다.
이를테면 두 사람에게는 ‘숨 가쁜 사랑’ 이전에도 사랑이 있었고 이후에도 사랑이 있었다. 그러나 숱한 사랑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언제나 서로의 곁을 지켰다. 진 세버그가 FBI와 언론의 감시 및 음해 공작, 잇따른 영화 실패 등으로 망가져갈 때 로맹 가리는 직접 감독한 영화 <킬>로 그녀와 함께했다. 그녀에게 삶의 의욕을 되찾아주기 위해서였다. 영화 실패 후 외려 로맹 가리를 위로하려고 쓴 진 세버그의 편지에는 이혼 뒤에도 서로가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었음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누구도—특히 내가 더했죠—내가 다시 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정신적 능력과 육체적 힘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런데 다시 일할 힘과 규율을 찾는 것이 내게는 생존의 문제라는 걸 당신은 알았어요. 그때 당신이 이 영화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그건 사랑에서 나온 행위였어요. (…) 이런 사랑의 행위를 위해 싸워야 하고, 그것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해요.
—189쪽


그렇다면 두 사람은 왜 헤어졌을까? 헤어진 뒤에도 여전히 지속된 사랑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 책은 이 물음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숱한 이해와 오해, 애정과 연민과 동질감으로 이룩한 ‘동반자’로서의 사랑을 이제껏 호사가들이 그래왔듯이 몇 마디 틀 안에 폭력적으로 담아낼 수 없는 까닭이다. 이 책은 다만 두 사람 모두 인종, 가족, 종교, 일, 애정 등에서 결핍된 자아를 보상하려는 욕구가 있었고, 그렇기에 서로 상처가 될 수 있었음을 넌지시 암시할 뿐이다.
감정이 쌓이고 사람과 사람이 얽혀가는 삶의 촌각들을 파편이 아닌 통째로서 이해하는 것, 특별한 가치판단 없이 두 사람의 삶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타인의 인생은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함부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론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글 속에서 ‘우연’과 ‘운명’이라는 낱말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말과 글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과 상황마저 삶의 한 조직으로 받아들이려는 의도에서다.
독자에겐 불친절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것은 로맹 가리의 뜻과 부합한다. 진 세버그가 정부 기관과 언론의 공세에 시달려 결국 목숨을 놓았을 때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기자회견까지 열어 FBI가 그녀를 죽였다며 누구보다 분개한 사람은 바로 로맹 가리다. 그런 그가 진 세버그의 죽음 1년 뒤, 자택에서 권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기기 전 남긴 글은 이렇다.


“진 세버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깨진 사랑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른 데 가서 알아보시길.”
—230쪽


진 세버그를 사랑했고, 진 세버그가 죽은 뒤 가장 큰 실의에 빠진 사람이 남긴 의아한 글. 그러나 이 글은 그의 삶을 통째로 보면 의아할 것이 없다. 그는 그저 자신과 진 세버그의 사랑이 한낱 이벤트로 기억되고 잊혀져가는 것을 경계했을 뿐이다. 그래서 자신들의 사랑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차라리 외면시켰다. 그 마음은 이어지는 저자의 말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삶을 결산하면서 안 좋았던 날들을 빼려고 그날들의 면전에 던진 묵비권이었을까. 어쩌면 추잡한 미디어로부터 자신들의 기억을 보호하기 위해 아름다운 날들에 서둘러 던진 베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자기 운명을 지키는 정의의 사도가 되고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길 원했던 그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행복의 몫을 결코 단념하지 않았다.
—231쪽


로맹 가리가 진 세버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죽음을 선택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진 세버그의 죽음을 계기로 단지 신물 나는 세상에 지친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소중한 기억은 남았고, 로맹 가리는 그 기억이 훼손되지 않게 지켜야 했다. 인종과 종교, 문단의 평가와 대중의 날 선 호기심이 자신을 고립시켜도 생의 행복한 기억들만은 자신을 지탱해주었으므로.

 

 

‘사랑’으로 읽어낸 생의 불가항력

 

샤를 드골, 쥘리에트 그레코, 앙드레 말로, 프랑수아즈 사강, 존 F. 케네디, 장 뤽 고다르, 클린트 이스트우드, 장 폴 벨몽도, 맬컴 X, 마틴 루터 킹…․…. 시대를 풍미한 유명인들의 이름이  68혁명과 흑인 폭동, 히피 문화와 누벨바그 등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사랑 이야기와 맞물린다. 우리가 파편적으로 기억하는 다양한 시대와 사건과 인물이 두 주인공의 삶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지켜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참 재미다. 전쟁과 인종차별, 편모 가정 속에서 자아를 형성해가는 로맹 가리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그의 바람기, 그리고 자의식을 천착하는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또 가족과 일, 사랑에서의 결핍을 사회운동 내지는 또 다른 사랑으로 보상하려는 진 세버그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녀의 죽음만큼 처절했던 생에의 집념에 깊은 숨을 들이쉬게 된다.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숨 가쁜 사랑』은 개인과 시대의 교점을 명확하게 짚어낸다. 글로 쉽게 풀기 힘든 생의 커다란 불가항력을 로맹 가리와 진 세버그의 세기의 사랑을 매개로 형상화하는 한편, 그것을 과감히 거스르려 했던 한 작가의 단호한 의지를 그린다. 그가 자신의 작품 곳곳에 심어둔 다음과 같은 단호한 의지를.


“세상을 확 뒤집어엎어 꺼져버리게 만들고 싶어.”
—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