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 의견으로 차별에 맞선 미국 진보의 상징
세상을 바꾼 역대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

 

 

적어도 사회 인적자원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이 마치 한 번에 한 명씩 무대에 서는 공연자들처럼 고위직에 올라가는 시대의 종말에 일조한다는 점에서 (대통령이 나를 대법관으로) 지명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1993년 6월 14일, 대법관 지명 수락 연설(54쪽에서) 

 

1993년 미국 백악관 로즈 가든. 빌 클린턴 대통령이 지명한 연방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수락 연설로 두 번째 여성 대법관 탄생의 의의를 밝힌다. 1981년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여성 대법관으로 처음 지명된 후 역대 두 번째로 긴즈버그가 대법관에 오른 것이다.
마음산책 열세 번째 말 시리즈 『긴즈버그의 말』은 법률가로서 평생 여성과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헌신해온 긴즈버그 대법관의 사상과 신념이 담긴 법정 의견서와 언론 매체, 강연, 포럼 등에서 했던 말을 총 망라해 긴즈버그 언어의 정수를 담았다. 책 말미의 「연보 및 주요 사건」은 긴즈버그가 참여한 법정 사건들을 연도별로 자세히 수록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1970년대부터 긴즈버그는 법률가로서 미국시민자유연맹(ACLU)와 협력해 여성 인권 사업을 추진하면서 특히 젠더 차별과 관련한 소송 사건들을 맡아 판례를 바꿔나가는 전략으로 차별을 크게 개선해 나간다. 연방대법관에 오른 후에는 남성 입학생만 받던 버지니아군사대학교에 여성이 지원할 기회를 최초로 여는 판결을 내리고(연방정부 대 버지니아 사건) 남성 동료보다 임금이 적었던 여성 노동자를 위해 반대 의견을 작성한다(레드베터 대 굿이어타이어사 사건).
조지 부시 정권 때 대통령 지명으로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이 다수 임명된 상황에서는 진보적 의제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고 2012~2013년 회기 동안 다섯 번의 소수 의견을 내면서 대법원 내 최다 소수 의견 기록을 세운다. 이를 본 한 로스쿨 학생이 그를 소개하는 텀블러 “노토리어스 RBG(Ruth Bader Ginsburg)”를 만들어 큰 화제가 되고 긴즈버그는 미국 젊은 층의 엄청난 지지를 받는다. 법정 의견서, 어록, 패션, 가족 등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인터넷 밈으로 재생산, 패러디되면서 미국 진보의 상징으로 떠오른 긴즈버그. 2015년에는 <타임> 지가 선정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되었고 그의 인생은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다큐멘터리 <나는 반대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로도 만들어졌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긴즈버그는 “온 힘을 다해 일할 수 있는 한 계속 일할 것이다”라고 밝히며 트럼프 정권 내에서 진보적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 책에 실린 세 번의 만남 이후에도 다시 인터뷰 약속을 잡아놓았지만 프리모 레비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성사되지 못했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보면 중단된 이 세 번의 인터뷰에서 레비는 자신의 삶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보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옮긴이의 말」)이다.

 

“올바른 동시에 단단한 의견을 내는 것이 한결같은 나의 목표다”
대법관의 신념과 태도가 담긴 사려 깊은 언어

 

 

정부의 다른 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만 법원에 대한 비판에 분노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비판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종신 임명직인 판사에게 합리적인 비판은 특히 중요하다. 겸손과 자기 의심이라는 건전한 태도를 판사석에서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33쪽에서

 

 

긴즈버그 대법관은 변호사 시절부터 젠더 차별과 관련한 사건들을 적극적으로 재판에 부쳐 승소로 이끌었고 최근 보수화된 미국 정세에 거침없이 반대 의견을 내 투사적인 이미지로 기억되지만, 실제로는 매우 신중한 성격이고 법관으로서는 오랜 기간 중도적인 노선을 취해왔다. 그는 합의체 법정에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려는 마음, 자신의 견해를 재고하려는 마음”이 중요하며 “상대편의 체스 말을 모조리 쓸어버리지 않는” 판사를 훌륭하다고 정의한다. 재판 연구원들이 작성한 법정 의견서 초고를 꼼꼼하게 교정하는 것으로도 유명한 그는 ‘과한 여담이나 미사구, 산만한 비난’ 없이 정제되고 분명한 표현을 중시한다. 정치적 입장이 정반대였던 故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과의 우정도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긴즈버그의 성향을 잘 드러낸다.
『긴즈버그의 말』은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법」에서 긴즈버그는 미국 헌법의 역사와 사법 체제를 돌아보고 법률가로서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성 법관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시절에 겪은 어려움을 꺼내면서도 오늘날 달라진 여성 법관의 위상에 대해 기쁜 마음을 드러낸다. 2부 「시민의 자유」에는 여러 재판에서 긴즈버그가 냈던 의견서가 다수 실렸다. 이를테면 투표권 차별을 막는데 기여했던 선거권법을 위헌이라 판결한 대법원의 의견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 우산을 내던지는 격’이라 비판하고, 에드워즈 대 힐리 사건에서는 여성의 배심원단 참여를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규정했던 주 법이 성별의 부재로 배심원의 공동체 대표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의견을 개진한다. 또한 페미니스트로서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수전 B. 앤서니,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세라 그림케, 폴리 머리 등을 언급하며 여성 인권 운동의 역사를 돌아본다. 3부 「나의 인생」에서는 대법관 이전에 개인으로서 긴즈버그의 소탈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독립적으로 살라고 용기를 북돋워 준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평생 긴즈버그를 지지하고 보살핀 남편 마틴과 아이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고백한다. 이 외에도 대학교에서 유럽 문학을 배우고 글쓰기에 눈뜬 계기, 두 번의 암 투병을 지나고 얻었던 깨달음 등이 담겨 있다.

 

『긴즈버그의 말』에 실린 각종 사건의 ‘변론’과 대법관으로 일하며 쓴 ‘반대 의견서’의 문장들을 당신이 소리 내 읽어보기를 권한다. 나는 당신이 당신의 목소리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세상을 바꾼 언어들을 말하고 들어 보기를 원한다. 한국은 미국만큼이나 더 나아져야 할 여지가 많은 나라이고, 이상하고 불평등한 듯하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헷갈리던 개념을 구체적인 언어의 형태로 만날 수 있다. 말은 힘이 세다. 법정에서 반대파를 설득하고 오늘의 세상을 어제보다 평등한 곳으로 바꿀 힘을 지닌 단련된 언어가 갖는 단단함을,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조금이라도 더 닮고 싶다. 이것이 언어가 지닐 수 있는 궁극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다혜(<씨네21> 기자, 작가), 「해제」에서

 

 

 

“차별을 겪어본 사람은 타인이 겪는 차별에 공감하기 쉽다”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운 긴 인생의 기억들

 

 

(하버드대 로스쿨) 원장이 신입 여학생들을 환영한다며 집으로 저녁 초대를 했다. …… 원장이 우리를 거실로 데리고 가더니 여학생들에게 한 명씩 돌아가며 남학생 자리를 빼앗으면서까지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온 이유를 말하라고 했다.
─129쪽에서

 

 

1959년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을 공동 수석으로 졸업하고 흠잡을 데 없는 이력을 가졌지만 긴즈버그는 계속해서 구직에 실패한다. 여성 법률가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그는 “유대인이고 여자인 데다 엄마”였기 때문에 자신을 고용하려 한 로펌이 한 군데도 없었다고 말한다. 럿거스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는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리면 재계약을 못 할까 봐 큰 옷을 빌려 입고 숨겼던 일을 꺼낸다. “차별을 겪어본 사람은 타인이 겪는 차별에 공감하기 쉽다”고 하는 그는 여성 인권 사업 등을 통해서 특히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을 위해 힘쓴다. 이를테면 1974년 게덜디그 대 아이엘로 사건에서 임신에 근거한 차별은 성별에 근거한 차별이 아니라고 판단한 대법원 판결을 맹비난하고, 출산이나 임신으로 일하기가 힘든 여성을 노동시장의 낙오자로 취급해서는 안 되며 이들에게 고용 보장과 소득 보존, 의료보험이 필수적이라 주장한다. 나아가 출산 여부는 여성의 선택으로, 법은 임신한 여성이 자기 삶의 주체로 설 수 있게 지원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은 연방대법원이 보수적으로 기운 오늘날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며 일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평등을 향해 걸어온 그의 목소리는 많은 독자들에게 큰 용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긴즈버그가 1970년대 주요 젠더 차별 사건을 도맡아 변론하고, 표현과 언론의 자유, 젠더 평등처럼 중요한 문제라면 타협 없이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사회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법률가의 사회적 역할을 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긴즈버그를 롤 모델로 삼아 삶의 방향을 새로 잡을 수 있다면 참 멋진 일이겠다. 그래서 그 사람이 ‘사회의 눈물’을 닦고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데 힘을 보탤 수있다면 더욱 멋지겠다. 소설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가 말했듯이 ‘너는 여자니까, 너는 남자니까’라는 말을 자유롭게 거부할 수 있고, 사회적 소수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말이다. 높낮이가 거의 없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이 여성 대법관이 전하는 메시지에 많은 사람이 주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옮긴이의 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