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와 직업인 사이에서 먹고살아요”

그리고 쓰는 작가의 진솔한 자기 고백


『말하자면 좋은 사람』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 등 90여 권의 책에 그림을 그리고, 『솔직함의 적정선』 『혼자 사는 여자』 등 4권의 책을 쓰고 그린 백두리 작가의 신작이 나왔다. 그간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에피소드와 다양한 감정의 변화를 포착해, 섬세한 그림과 글로 풀어낸 에세이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이번에는 철저하게 직업인이자 생활인으로서의 그림작가, 나아가 한 프리랜서 노동자의 삶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저자 백두리는 ‘작가특보’ 프로젝트를 맞아 『그리고 먹고살려고요』에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그림작가의 여정을 슬며시 보여준다. 총 13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크게 여섯 파트로 구분할 수 있다. 파트 1(1·2장)에서는 놀이로 즐기며 쓰고 그리던 어린 시절부터 취업 실패 후 출판사에 그림엽서와 메일을 돌리던 일화를, 파트 2(3·4·5·6장)에서는 그림과 글을 창작하는 과정에 관한 노하우를, 파트 3(7·8장)에서는 직업인職業人 그림작가가 갖춰야 할 자세와 협업의 고충을, 파트 4(9·10장)에서는 프리랜서 생활의 장단점과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기는 법을, 파트 5(11·12장)에서는 그림작가로서의 고뇌와 앞날에 대한 고민 등을 사실적으로 털어놓는다. 마지막으로 파트 6(13장)에서는 프리랜서 작가가 될 이들에게 저자만의 ‘별것 아닌 팁 33개’를 전수한다.

놀이로 시작한 그림이 언제부터 먹고살기 위한 수단이 되었는지, 낯가리고 소심한 성격의 저자가 일을 받기 위해 무슨 일까지 했는지, 그려내는 일에 권태를 느낄 때 어떻게 해소했는지 같은 내밀한 이야기들은 안타까움과 감탄을 동시에 자아낸다. 그리고 먹고사는 상업미술작가의 하루를 백두리 특유의 위트 있는 드로잉과 함께 읽음으로써 독자는 전업 작가라는 업業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림작가에게 그림은 미지의 세계에서 온 고귀하고 순수한 결정체가 아니라, 치열하게 싸우고 버텨내 살아남은 현실의 부산물이다. 어른들은 어린 나에게 그림을 그려 어떻게 먹고살 거냐고 말했다. 다행히 아직까진 굶어 죽지 않고 그림 그려 먹고산다. 순수미술작가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그림을 팔고 있으니 그림이 나를 먹여 살리고 있으며, 나는 먹고살기 위해 다시 그림을 만들어낸다.

─8쪽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작가는 아닙니다”

한발 ‘먼저’ 시작한 작가의 실질적인 조언


어느 분야에서건 자기만의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 이들의 경험담은 귀하게 다가온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그림작가가 되”지는 않았지만, 업계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 활약하는 백두리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저자는 작가 지망생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조언이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경계하면서도 겸허하고 허심탄회하게 지금에 이른 비결과 노하우를 들려준다.

작가에게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하는 고민은 작가 고유의 스타일, 나아가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저자의 답은 명료하다. 자연스레 떠오르는 생각들을 꾸준히 그려내는 것. “그림도 글도 하나의 소통 방법”이니 구태여 독특한 아이디어를 구상하려 애쓰지 말고, 일상 속 장면과 순간의 감정들을 건져 올려 일단 쓰고 그려보라는 것이다. 또 스타일이란 수없이 만들어낸 결과물 안에서 형성되니, 스타일에 집착하지 말고 손이 가는 대로 쓰고 그릴 것을 권한다.

더불어 그 연습 방법으로 그림일기를 추천한다. 특별한 목적이나 주제 의식은 필요 없다. 그날그날 겪은 일과 감상을 글과 그림으로 짤막하게나마 기록하는 것만으로 훌륭한 연습이 되고, 그렇게 쌓인 그림일기는 아이디어 저장소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블로그에 올리던 그림일기가 출판사 편집자의 눈에 띈 덕에 첫 번째 책을 출간할 수 있었다.


자기 생각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이 쌓이면 의도하지 않아도 하나의 카테고리가 만들어진다. 나에 대해 그렸을 뿐인데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무엇을 계속 그리고 싶은지 저절로 방향이 드러난다.

—45쪽


그림은 잠재의식과 내면의 욕망을 풀어내는 창구이므로 그림일기는 감정 기록장 역할도 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둔 또 다른 내가 늘 세상 밖을 활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의식이 드러나려 할 때 의식적으로 그것을 붙잡아 기록해둔다.

—81쪽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지속할 순 없다”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


많은 사람이 작가를 선망하고 책을 내고 싶어 한다. 그만큼 ‘작가’로 불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됐다. 이 책은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아니면 저자처럼 그리면서 쓰든지에 상관없이 본인의 창작물을 출간하려는 이들에게 프리랜서 전업 작가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늘 좋은 결과물로 주목받는 작가의 삶 이면에 드리워진 고단함과 애잔함을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작가 지망생들이 나름의 각오를 하길 바라서다.

저자는 마감 일정, 대중의 평가, 불안한 미래, 불안정한 수입, 건강 문제 등 프리랜서가 맞닥뜨려야 하는 무수한 어려움에 대해 토로한다. 특히 클라이언트와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스트레스와 상처가 생각보다 더 힘들다는 고백은 새겨들을 만하다. 새로운 일을 할 때마다 매번 새로운 팀이 꾸려지므로 협업에 대한 이해와 유연한 자세를 지니라고 강조한다. 창작을 하는 예술가로서의 자존감과 대가를 받는 직업인 사이의 내적 갈등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 일과 일상의 분리가 어려운 데서 오는 갖가지 고충을 이야기한다. 작업과 휴식의 공간이 같으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어영부영 하루를 보내기 일쑤고, 시간을 정해놓고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게 아니니 언제나 창작의 소재를 찾기 위해 촉을 세우게 된다. 저자는 작업실이나 카페 등 작업만 하는 공간을 이용하거나 본인 나름의 작업 규칙과 시간, 하루 할당량을 정하라고 말한다. 그렇게 하면 정신적 분리는 불가능할지라도 신체적 분리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가 전하는 세심한 조언들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자유로운 업무 환경 이면에 프리랜서로서 감내해야 할 사항들을 한 번쯤 점검해볼 기회를 줄 것이다.


우리는 같은 말을 쓰고 있지만, 생각을 완전히 일치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개인의 생각을 이해하고 서로의 언어로 번역하여 하나의 이미지로 도출하는 데는 어느 정도 배려와 노력이 필요하다.

—97쪽


예술가인 줄 알았는데 예술을 하는 게 아니었고, 예술이 아님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있는데 예술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업미술작가라는 이름으로 예술가와 직업인 사이에 놓인 다리의 중간 어디쯤엔가 앉아 있다.

—153~1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