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요커> 교열자 콤마퀸의 장기근속 휴가

우조에 취해서 만난 그리스의 언어, 사람, 신화


대외 직함은 교열자, 사내에서는 원고를 인쇄 직전까지 책임지는 사람을 뜻하는 오케이어(OK’er)라 불리며 콤마퀸이라는 별칭이 있고 더러는 그 깐깐함에 “마녀”라고도 칭하는 <뉴요커>의 책임교열자 메리 노리스가 돌아왔다. 1925년 창간돼 100년 가까운 역사를 이어온 유력 매체 <뉴요커>에서 40년 넘게 근속하며 원고를 매만진 교열자답게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과 호기심, 넘치는 유머를 싸들고 서양 문화의 기원인 그리스로 건너간다. 

전작 『뉴욕은 교열 중』에서 교열자라는 전문직과 <뉴요커>의 속사정을 밝히고 영어, 나아가 언어를 섬세하게 만지작거렸던 저자는 신작 『그리스는 교열 중』에서 자신의 품을 더욱 넓힌다. 장기근속자의 당당함으로 보스에게 긴 휴가를 따내, 집과 직장과 모국어가 있는 안락한 뉴욕을 벗어나서, 죽은언어(그리스어)와 고대의 신화, 따가운 태양과 올리브나무, 그리고 와인과 우조와 갑작스러운 연애가 있는 낯선 나라로 홀로 떠난 여행. 고대와 현대, 신화와 현실이 공존하는 그리스에서 저자는 예순 중반이 훌쩍 넘은 나이에 괘념치 않고 버스로, 렌터카로, 도보로 신화의 흔적을 따라 곳곳을 찾는다. 녹내장에 “집중성 부족”이라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리한 교열자의 눈으로 여행 내내 신화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읽어내며, 콤마퀸이라는 명성이 무색하게 떠듬떠듬한 그리스어로 오해를 주고받으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싱글의 자유로운 해프닝을 이어나간다. 이를테면 자신의 삶을 교열해보는 경험.

『그리스는 교열 중』은 세계적 정평을 자랑하는 교양지 <뉴요커>에서 오랫동안 글을 다룬 교열자의 전문성이 빛나는 지적인 산문이자 주체적인 여성의 당찬 여행기이며 그리스어와 영어, 그리스신화의 관계를 색다르게 들려주는 인문서다. 『그리스는 교열 중』은 『뉴욕은 교열 중』에 이은 메리 노리스의 두 번째 책으로, 미국에서는 올해 4월 출간되었다.


그리스어는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지고, 그리스는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연합의 끝자락으로, 그 국민은 이탈리아의 가난한 친척처럼 취급되며, 국가 경제는 늘 위태로워 보인다. 아테네 거리의 네온사인에 갈수록 늘어나는 영어를 보면 나는 걱정스럽다. 그리스 고전은─가히 호메로스 작품 번역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번성하고 있지만 현대 그리스어는 죽은언어가 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일상에서 신화 속 이름들을 사용한다. 아폴로 우주 비행 계획, 값비싼 에르메스(Hermès) 스카프, 되직한 올림포스 요구르트. 내가 “아테나 주차장” 간판을 본 곳은 ‘천사들의 도시’라는 뜻을 지닌 로스앤젤레스인데 이 지명은 그리스어가 스페인어를 거쳐서 들어온 것이다. άγγελος(ángelos), 천사, 메신저. 우리를 그리스어와 연결해주는 것은 그리스어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보다 더 많다. 나는 사람들이 그리스 알파벳에 겁먹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스는 우리에게 알파벳을 선사했다. 

-27쪽



그리스어, 신화, 우조, 그리스풍 연애……

그리스의 알파와 오메가


엘레프시나 탐험 중에 내가 사용한 그리스어 동사는 웬일인지 내내 후진하듯 모두 과거 시제에 고착됐다. 나는 버스에 올라타서 운전사에게 물었다. “신성한 길로 엘레프시나 갔지요?” 그는 다소 신중하게 고개를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이며 긍정의 뜻을 나타냈다. 나는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내가 앞서 의심했듯이 『블루 가이드』의 글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아테네 교외에는 폐타이어가 쌓인 넓은 야적장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이건 클리블랜드나 뉴저지주 엘리자베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내가 탄 버스는 한 교회당을 지나쳤는데 난 이것이 다프니의 수도원인 줄 알고─버스 안에서 연신 성호를 긋는 그리스인들을 보고─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운전사는 나를 아리송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걸어갔어요”라고 나는 설명했다. 그는 씩 웃었다. 그래, 나는 걸어갔다. 한 시간 남짓 걸어가니 다프니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였다. 

-129~130쪽


어려서부터 스스로를 지혜의 신 아테나에 빙의했으며, 그리스어에 대한 애정으로 재직 중에도 뉴욕대학교 평생교육원과 컬럼비아대학교 기초 그리스어 수업, 테살로니키 국제 어학원 등을 이수한 준비된 모험가. 이 말인즉, 저자는 완벽하지 않은 그리스어를 자랑한다. 그리스비극의 인물들처럼 필시 실수를 부르는 결핍을 바탕으로 저자는 이국땅에서 낯선 언어와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을 마주해나간다. 다만 저자는 비극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실수와 오해를 겪으며 그리스어를 몸으로 깨치고, 직업 정신을 버리지 못한 채 그리스어와 영어의 상관성을 탐구하고, 고대의 폐허에서 자신의 일상을 신화에 빗대어보고, 즉흥적인 만남들 속에서 노년에도 짜릿한 가능성이 꺼지지 않음을 확인하고, ‘아프로디테의 욕장’에 알몸으로 뛰어들어 자신이 개발한 ‘파노라마식’ 영법을 마음껏 구사하는, 할 수 있는 건 다 하는 여행. 거기에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축약한 듯이 실수와 반성을 통한 성장과 향수가 있다. 

『그리스는 교열 중』의 전반부는 유럽에서도 ‘죽은언어’로 이울어가는 그리스어의 기초와 가까워지는 데 할애되고 있다. 지렁이 같은 그리스 알파벳이 눈에 익을 즈음이면 고대의 매력과 콤마퀸의 유머가 모습을 드러낸다.



할 말을 하는 교열자의 글

절제를 아는 유머와 감동


유쾌하다. 메리 노리스는 비극의 광맥을 캐면서도 자주 희극을 노린다.

─<월스트리트저널>


<뉴요커> 교열자 메리 노리스가 예순넷의 나이에 첫 책 『뉴욕은 교열 중』을 출간하자 그를 알거나 그의 손에 원고를 맡겼었거나 그의 글을 접한 사람들은 모두 당연한 게 왔다는 듯 칭찬을 쏟았고, 영미권 유력 매체들은 주저 않고 이 책을 그해 “올해의 책”으로 꼽았다. 2019년 신작 『그리스는 교열 중』도 그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소포모어징크스는 없다는 듯 머뭇거리지 않으면서도 언제든 감정이 격해지기 전에 멈출 줄 아는 그의 글에 여러 매체들이 호감 어린 평을 내놓고 있다.

『그리스는 교열 중』은 언어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지만, 전작에 이어 여전히 한 교열자의 일, 생활, 취향, 나아가 인생을 솔직하게 담은, 고도로 정련된 산문이다. 그리스어에 빠진 계기로 시작해 그리스 여행의 준비 단계와 여정으로 기본 골격을 갖추고는 <뉴요커>의 인수합병 같은 속사정이며 동료들 담화, 큰오빠를 여읜 기억과 남은 가족의 일화, 연극반에서 고대극을 연기할 때의 소동 등 다채로운 이야기를 이어간다. 무엇이든 그에게 글감이 되고, 모두가 그리스신화와 닿아 있다. 충만한 즐거움부터 비길 데 없는 슬픔까지 그의 이야기는 감정의 극단에 가닿을 뻔하다가도 이내 새삼스럽다는 듯 희극 쪽으로 물꼬를 튼다. 40년 동안 숱한 글을 읽고 만지고 자기 글을 쓰며 균형감을 다진 교열자의 강단이 『그리스는 교열 중』을 지탱하고 있다. 어느 부분에서도 그는 메리 노리스다.


미미는 내게 미노스 유적의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가기를 재촉하며 나를 가장 으슥한 폐허 구석으로 데려갔다. 여기는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를 지닌 미노타우로스의 동굴이었을까? 미노스의 아내 파시파에가 낳은 그 괴물이 다이달로스의 디자인에 의해 여기에 갇혀 있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이 막 들기 시작하는 순간에 미미가 내게 몸을 비볐다. 난 미미를 좋아했지만 우리의 관계가 발전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성관계를 가지려면 그 전에 내가 그의 토마토 농장을 방문하거나 적어도 점심 한 끼는 같이해야─혹은 영화 한 편이라도 같이 봐야─하는 것 아닌가? 나는 그의 행동이 내게는 너무 빠른 일이라고 말하려 했다. 그리스어로 ‘빠른’은 grígora이고 그리스인들은 무언가를 강조할 때 그것 을 두 번 말하므로 (내 딴에는) ‘너무 빨라요’라는 뜻으로 “Grígora, grígora”라고 나는 말했다. 하지만 내가 했던 이 말은 “더 빨리, 더 빨리”였다.

-72~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