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의 우화집 세트 <사노 요코 판타스틱 이야기>
다채로움이 가득한 네 편의 이야기와 그림들


사노 요코. 세계적인 밀리언셀러 『100만 번 산 고양이』의 저자이자 일러스트레이터. 전작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등에서 볼 수 있듯, 그녀는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이 예리하게 반짝이는 글을 써 큰 주목을 받은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노 요코는 에세이스트 이전에 그림책 작가였다. 마음산책은 그녀의 본업인 ‘그림책 작가’로 다시 시선을 돌려 사노 요코의 진면목을 알려줄 우화집을 펴냈다. 『사노 요코 돼지』와 『사노 요코 고릴라』의 두 권으로 구성된 <사노 요코 판타스틱 이야기> 세트에는 사노 요코 특유의 냉소적이고 유쾌한 이야기들과 더불어 그녀의 묘하고 신비로운 그림들이 한껏 담겼다.


「이쪽 돼지 저쪽 돼지」는 읽는 사람에 따라, 또 그 사람이 처한 환경이나 독서의 시기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로 달리 읽히는 이야기다. 반려묘를 무릎에 얹고 후기를 쓰는 오늘의 내게는 이 이야기가 인간과 기타 동물에 관한 우화로 다가왔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현대사회와 원시사회, 선진국과 제3세계,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전체주의와 개인주의 등의 은유로 읽힐 것이다.
─「옮긴이의 말」, 『사노 요코 돼지』 174-175쪽


<사노 요코 판타스틱 이야기>는 총 두 권으로 구성되며 권당 두 편씩, 총 네 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녀의 팬들조차 쉽게 접할 수 없었던 독특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을 즐길 수 있다. 『사노 요코 돼지』에는 「이쪽 돼지 저쪽 돼지」와 「여윈 새끼 돼지의 하루」가, 『사노 요코 고릴라』에는 「꿈틀꿈틀해줘 고릴라야」와 「그저 돼지지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제각기 개성 넘치는 일러스트가 책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사노 요코의 필치는 수다스러우며, 한 마디 한 마디에 냉소와 염세가 가득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을 향한 따스한 애정이 진하게 배어나오는데, 뒤통수가 서늘하다가도 마음 어딘가 따스하게 데워지는 듯한 입체적인 맛의 독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사노 요코 판타스틱 이야기>에서 그녀는 동물이나 사물을 의인화시켜 죽어가는 것에 마음 아파하다가도 어느새 차갑게 돌변해 인간을 향한 조소를 숨기지 않는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사노 요코의 정수가 담긴 책이 될 것이다. 


“봄이 오면 내가 확 피어나지 않나, 대개는 핀 다음에 알아차리지. 아, 벚꽃이 이런 데 있었구나 하고. 그러면 내 밑동에서 야단법석을 떨고는 잊어버린다. 이듬해 꽃이 다시 필 때까지. 내 잎사귀 모양이 어떤지는 보지 않는 거다.”
“그건 잎사귀에 개성이 없기 때문이잖아. 난 연두색 새잎이 돋을 때부터 다섯 갈래로 정확히 갈라진 잎사귀가 되게끔 애쓰니까 아무도 틀리지 않지. 아기 손이랑 비교하기도 하고. 인간 아기의 손 따위가 내 잎사귀랑 닮았다는 말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조형적으로 내 쪽이 더 완벽하니까. 하지만 난 아무래도 좋아. 대단치 않은 일인걸.”
─「꿈틀꿈틀해줘 고릴라야」, 『사노 요코 고릴라』 37쪽



꿈처럼 기이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그림들
‘그림책 작가’가 본업인 사노 요코의 진면목


<사노 요코 판타스틱 이야기>에 실린 네 편의 이야기는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일러스트가 함께 수록되었다. 「꿈틀꿈틀해줘 고릴라야」의 휘갈긴 선으로 이루어진 인물들은 꿈속에서 어지럽게 펼쳐지는 이미지처럼 몽롱하고 애달프다. 한편 「그저 돼지지만」에서는 페이지마다 우산을 손에 든 채 무심하게 자리를 차지한 동물들이 편견과 위선이 가득한 인간들을 조롱하는 듯 웃는다. 「이쪽 돼지 저쪽 돼지」의 그림들은 사노 요코 사후 아들이 발견한 것으로, 이야기 전반에 걸친 불안하고 서늘한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최근 사노 요코의 산문집들이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그녀의 산문가적 면모가 더 부각되었지만, 그녀는 돼지를 그리기 위해 돼지 농가에서 몇 시간이나 돼지 사진을 찍으며 관찰하고, 아들과의 그림 경쟁에서 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만큼 자신의 그림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글만큼 뛰어난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투박한 듯 기묘하고 차가운 그림으로 페이지를 쉽게 넘길 수 없게 만든다. <사노 요코 판타스틱 이야기>에 수록된 여러 화풍의 그림과 함께 독자들은 그녀가 구축한 환상적인 세계로 더욱 깊이 들어설 수 있 것이다.


그날 밤, 돼지는 침대 위에서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돼지가 밍크코트를 입어도 되나?”
돼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토끼가 밍크코트를 입어도 되나?”
돼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쪽 돼지 저쪽 돼지」, 『사노 요코 돼지』 63쪽



스러지는 생명에 눈물짓는 따뜻한 시선
몽상과 리얼리티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상상력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경험이 있던 사노 요코는 주로 우리 일상생활에 깔린 삶과 죽음을 이야기해왔다. 「꿈틀꿈틀해줘 고릴라야」의 후기에서 그녀는 자신의 생을 반추하며 함께한 의자들에 대한 단상을 기록하는데, 글의 끝에서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스러져간다. 갖가지 운명이 찾아와 이윽고 사라져간다”라며 낡아 없어지는 것들, 용도를 다해 버려지는 것들에 대한 깊은 아쉬움을 표한다. 의자와 고릴라가 만나 사랑에 빠지고 생의 마지막 여행을 함께 떠난다는, 얼핏 기괴해 보이는 이야기에 생과 죽음의 순간을 절묘하게 녹여내는 사노 요코의 솜씨는 실로 정교하다. 그녀는 자신의 말대로 이야기를 통해 ‘몽상’과 ‘리얼리티’의 경계를 허문다.


“죽어서까지 시끄러운 놈이군. 너, 요란하게 다 타버렸잖아. 조용히 좀 해.”
죽은 고양이가 투덜거렸다.
“있는 힘껏 산 거야.”
“있는 힘껏 죽어 있는 거냐.”
“난 아주 짧게 살았던 것 같아. 새처럼, 꽃처럼. 정말 멋졌는데. 난 다시 한 번 새하얀 손수건이 되어도 똑같이 살 거야. 새처럼, 꽃처럼.”
─「꿈틀꿈틀해줘 고릴라야」, 『사노 요코 고릴라』 56쪽


「그저 돼지지만」은 서른 마리의 의인화된 동물들이 등장한다. 이 책 원서의 편집자는 “이 작품을 어떤 장르로 분류해야 할지” 곤혹스럽다고 토로하며 “동물들의 박물지” 정도가 적당할 것이라 말한다. ‘동물 아포리즘’처럼 느껴질 만큼 짧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단상과 반복을 통해 리듬을 살린 것, 짧고 서정적인 이야기들로 이루어진 것까지, 사노 요코는 서른 마리 동물의 제각각인 단상을 다양한 방식으로 서술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동물에 관해 자유롭게 쓴 「그저 돼지지만」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사노 요코의 유쾌하고 따뜻한, 그리고 재치와 독설이 가득한 문장들을 접할 수 있다.


질투로 똬리를 트는 뱀과 마주치면, 늙은 토끼조차 젊은 아내가 아들들의 가정교사와 사랑의 도피를 떠난 먼 옛날의 일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슬픔으로 나뭇가지에 축 늘어진 뱀을 보면, 여태껏 진정한 슬픔에 부닥친 적 없는 곰은 언젠가 다가올 슬픔 때문에 두려움이 생겼다.
딱히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그저 돼지지만」, 『사노 요코 고릴라』 124-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