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라는 말 이전에 ‘사회’란 개념은 없었다
―당연하게 보이는 한자어의 이면

 

김동인은 한국 소설에 ‘그’라는 3인칭대명사를 처음 쓴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와 ‘그녀’는 각각 he와 she의 번역어로, 근대 초창기에는 이 번역어가 없었다. 김동인은 남녀 구분 없이 모두 ‘그’를 썼으며 염상섭은 일본어 ‘彼’와 ‘彼女’를 그대로 썼다. 서구어 he와 she가 일본어 ‘彼’와 ‘彼女’로 번역되었고, 그것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그’와 ‘그녀’다.
이처럼 우리가 무심코 쓰는 한자어는 대부분 서구의 언어를 일본에서 번역한 것들이다. ‘사회’ ‘개인’ ‘근대’ ‘존재’ 등, 학문‧사상 용어가 특히 그렇다. 지금은 ‘society=사회’란 등식을 누구나 당연히 여긴다. 하지만 애초에 ‘사회’란 말은 없었다. 그에 해당하는 개념과 현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사회’는 society를 번역하기 위해 일본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말이었고, 다른 번역어들을 거쳐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단어다. 
『번역어의 성립』은 서구어가 일본 근대를 만나 새로운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을 파헤친 책이다. 저자 야나부 아키라는 일본 학계에서 번역어와 번역 문화 연구 분야에서 독보적인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는 중국문화 혹은 서구문화의 번역으로 생성된 일본 학문과 사상의 기본 성격을 ‘번역어’의 성립 과정을 단서로 밝혀내는 데 주력해왔다. 번역어를 통해 수용된 이문화가 문화 전반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규명한, 비교문화론이자 문명비평론이다.
그의 대표 저서인 이 책은 2003년 국내에서 『번역어 성립 사정』이란 제목으로 출간돼 주목받은 바 있다. 그 후 절판이 되어 아쉬워하는 독자들이 많던 터에, 이번에 새로 번역한 개정판으로 선보인다. 초판본의 크고 작은 오류를 잡아내고 빠짐없이 옮겨 완성도를 높였다.
저자는 지금 우리가 당연시하는 단어들이 ‘필연적으로 그것이어야만’ 했던 것은 아니란 사실을 일깨운다. 근대 서구 문명이 어떻게 일본으로 수용, 변용되었는지 살필 수 있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우리에게도 의미가 큰 책이다.

 


 

낯선 한자어는 보석상자였다
―‘카세트 효과’로 유행하고 살아남은 말들

 

이 책은 현대 사상의 기본이 되는 10개의 한자어를 중점적으로 해부한다. 번역 대상인 서구어(영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등)의 원래 뜻이 무엇이었고 그것이 어떤 번역 과정을 거쳤는지 짚어간다. 당시의 여러 사전과 잡지, 학술서 등을 근거로 정교하게 고증했다.
일본은 일찍이 중국과 서양의 선진 문명을 한자어로 ‘번역’해 받아들인 나라다. 19세기 중엽 서구어를 번역하기 전, 일본에는 그 말에 해당하는 현실이나 개념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번역 과정은 언어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문화‧사상적 문제를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영어 단어 individual은 처음에 그 뜻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것은 society가 뜻하는 넓은 인간관계가 일본에 없었고 따라서 표현할 말도 찾기 힘들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individual은 초기에 ‘혼자’ ‘일인’ ‘사람’ 등으로 번역되었다. 문제는 그런 평이한 말로는 individual의 사상적인 의미를 담아내기 부족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당시 지식인 번역자들은 ‘인민각개’나 ‘일신의 품행’ ‘독일개인’과 같은 한자어를 택했다. 이후 ‘일개인’으로 정착되는 듯하다 ‘일’이 떨어져나가, 1891년 무렵부터 ‘개인’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한자어도 원어의 뜻에 딱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번역자 임의로 정한 약속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들은 일본의 오랜 전통으로 인해 ‘어려워 보이는 한자어에는 뭔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믿고 그 말을 썼다.
이러한 현상을 저자는 ‘카세트(cassette, 보석상자) 효과’라 부른다. 사람들은 보석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 몰라도 그 자체에 이끌린다. ‘사회’나 ‘개인’과 같은 번역어 역시 낯설고 어려워 보였기에 오히려 동경의 대상이 되고, 손쉽게 쓰게 되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존재’는 한 단어다. (중략) 사람들은 이것이 번역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이며, 우리가 평소에 별로 들어보지 못한 뜻의 단어라는 것은 알지만, 그때 ‘존’이나 ‘재’와 연관해 그 의미를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존재’란 뭔가 심각하고 고상한 의미를 지닌 것 같은 효과를 내는 ‘카세트(보석상자)’와 같은 단어다. 예를 들어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하는 대신에 ‘내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고 말하면 왠지 접근하기 어려운 심각한 문제인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식이다.
―121〜122쪽에서

 

‘사회’나 ‘개인’ ‘근대’와 같은 신조어를 번역어로 쓰든, ‘자연’ ‘권리’ ‘자유’와 같이 기존에 쓰던 한자어에 새로운 뜻을 더하든 혼란과 모순이 생겨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번역어는 일상적으로 쓰는 말과 동떨어져 있다. 또한 모호하기 때문에 이념 전파의 도구가 되기도 하고, 누가 어떤 맥락에서 쓰는가에 따라 동경 혹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유’를 지지하는 문명개화파에게 ‘자유’란 무엇일까? (중략) 물론 liberty는 아니다. 예전부터 일상적으로 써온 ‘자유’도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바다를 건너’ 들어온 고마운 것이다. (중략) 어쨌거나 좋은 것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다. 이에 반대하는 보수파 쪽도 ‘자유’라는 말의 의미를 ‘제멋대로’로 이해하고 있다. 예전부터 써온 일상어의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중략) 들어본 적도 없는 한자어”라고 하면서, 어쨌거나 나쁜 말이라는 인식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일상어의 뜻에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카세트 효과’가 발생한 셈이다.
―187쪽에서

 


 

언어와 문화로 근대를 탐구하다
―한국 근대어 연구의 토대

 

저자는 단언한다. 한 번역어가 선택되고 살아남은 이유가, 그것이 의미상 가장 적절한 단어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분명한 건 ‘번역어다운’ 말이 정착한다는 점이다. 번역어는 모국어의 문맥 속으로 들어온, 다른 태생에 다른 뜻을 지닌 말이다. 일본어에서 음독(音讀)을 하는 한자어는 본래 이국 태생의 말이었다. 일본어는 이국 태생의 말의 이질적인 성격은 그대로 남긴 채로 고유의 말과 혼재시켜왔다. 근대 이후의 번역어에 두 자로 된 한자어가 많은 것도 이런 전통의 원칙을 자연스럽게 따른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권이 만날 때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번역, 그 대상이 되는 언어와 번역어는 일대일로 대응하지 않는다. 하나의 언어로 고정할 수 없으며 번역자의 의도가 개입되고 사회적으로 쓰이면서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저자는 번역에서 생기는 문제를 ‘문화적인 사건의 한 요소’로 보고 그것을 둘러싼 학문과 사상, 사회와 문화 체계를 살핀다. 일본의 근대를 정치‧경제적 관점이 아니라 언어와 문화라는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했다는 의의가 있다.
『번역어의 성립』에서 다루는 개념어들은 한자문화권인 한국과 중국에서도 함께 쓰인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근대 언어라고 부를 수 있다. 19세기에 형성된 일본의 번역어가 이후 한국과 중국에 전파되면서 언어와 문화, 정치적 영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이 책은 동아시아 근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중요한 탐구서이자, 한국 근대어를 연구하는 데 유용한 토대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