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삶과 미래의 꿈이 만나는 곳, 서촌
‘무면허 옥상화가’의 새로운 삶 이야기


일간지 기자와 편집장을 지낸 인정받던 열혈 커리어우먼은 2005년 돌연 사표를 내고 뉴욕으로 떠났다. 그리고 평범한 직장의 리셉셔니스트로 일하며 집세와 각종 생활비에 벌벌 떠는 소심 싱글맘이자 능숙하지 못한 영어로 딸에게 핀잔 듣는 신세가 되었다. 안정적인 직업과 한 몸 같은 모국어, 익숙한 땅을 버리고 택한 인생 2막 이야기 『브루클린 오후 2시』를 통해 특유의 솔직하고 유쾌한 삶을 펼쳐 보였던 저자 김미경의 두 번째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그사이 7년간의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저자는 인왕산에 포근하게 안긴 서촌에 둥지를 틀었고 아름다운재단 사무총장으로 일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기’를 결심, ‘1억 년 후 화가’의 꿈을 앞당겼다.
 이 책은 서울에서 살았던 저자의 자아와 뉴욕에서 보냈던 시간 그리고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의 시간이 만나 쉰여섯 살의 나이로 ‘1억 년 후 화가’의 꿈을 어떻게 앞당기게 되었는지 그 ‘열정’의 정체를 시종일관 흥미롭게 털어놓는다. 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쉰여섯 살의 나이로 회사를 뛰쳐나와 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어진 것인지, 길거리에서 옥상에서 그림 그리며 어떤 세상을 만나고 있는지, 그가 그리는 서촌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한 발짝 한 발짝 화가가 되어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촌은 그가 20대 시절 자취했던 곳이자 미국에서 돌아와 집과 직장을 갖게 된 곳. 인왕산 아래 한옥과 일제시대 가옥들, 현대식 빌라, 주택들이 뒤엉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것들과 가장 빠른 변화가 공존하는 이곳은 그의 ‘애인이자 삶의 터전이자 세상이자 우주’가 되었다. 이로써 서촌은 단순히 경복궁 서쪽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 공동체의 시간과 기억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자 지나온 삶과 미래의 꿈이 만나는 김미경의 ‘현존의 시점’이 된다.
 『서촌 오후 4시』는 이른바 서촌 옥상화가가 된 저자의 인생 3막 이야기이자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보고 싶은, 무면허의 자발적 행복자를 위한 따뜻한 조언의 책이다.
 
무. 면. 허. 그렇다. 이 책은 ‘무면허 화가의 좌충우돌기’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 줄 일을 막기 위해 면허라는 제도가 생겨났지만, 면허 제도는 그 자체로 사람들을 위축시키기도 한다. 면허, 자격증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세상이 됐다. 하지만 사랑하기, 숨쉬기, 걷기, 춤추기, 노래하기, 그리고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세상살이에 가장 중요한 이 모든 것들은 모두 면허가 필요 없는 일들이다.
수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덮는 순간, ‘화가가 되는 일은 숨쉬기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정말 면허가 필요 없는 일이구나. 나도 그려 봐야지’ 하며 고개 끄덕이기를 기대해본다. 면허증에 기대지 않고 제멋대로 살고 싶은 사람, 자기 색깔을 내며 더 자유롭게 살고 싶은 사람,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살 각오가 되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새롭게 씩씩하게 시작하고 싶은 사람들 모두에게 이 책을 바친다.
-9~10쪽 「책을 내면서」에서



인생 오후 4시는 어떤 모습인가
그림으로 깨쳐가는 인생의 맛


저자는 지금 자신이 인생의 오후 4시쯤에 온 것 같다고 말한다. “해가 서쪽으로 훌쩍 넘어가기 시작하는 오후 4시. 그림자도 짙어지고, 맘도 깊어지는 시간” 그리하여 제목도 『서촌 오후  4시』다. 그림도 글도 길어지는 그림자의 흔적을 보여주고 싶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 책은 인생의 오후 4시를 서촌에서 보내고 있는 여자의 이야기면서 오후 4시만큼 무르익은 서촌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렇게 서촌의 사계절을 세 번 보내고 배우게 된 생활 속 깨달음들은 마치 인생의 사계처럼 반짝인다.
 첫 장 「산다는 것 신나는 것」은 인생 오후 4시에 다다른 저자가 뉴욕을 버리고 서촌에 자리를 잡기까지, 멀쩡한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림 노동자로 살 결심을 하기까지 소소한 일상의 순간들에서 깨치는 지혜가 생생하다. 인생을 시작하기에 언제나 늦은 나이는 없으며 모든 나이란 무엇을 시작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는 긍정성에 이른다.

 

생각해보면 누구든, 언제든 딱 출가하기 좋은 나이고, 딱 연애하기 좋은 나이고, 딱 신진작가 되기 좋은 나이다. 딱 누구든, 언제든. 딱 마음먹기만 하면 말이다. 
-31쪽에서

 

 두 번째 장 「나는야 옥상화가」에서는 옥상화가로서 길거리 화가로서 서촌 구석구석을 누비며 그려가는 그림 이야기를 담았다.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다 전경에게 쫓겨난 사연부터 보안계에 불려간 이야기, 그렇게 옥상화가가 된 연유, 빨래 널린 풍경과 감나무 같은 한국만의 문화에 대한 애정까지, 그림을 그리면서 배우는 인생의 묘미와 생활의 철학이 진진하다.
              
‘세상에 망친 그림은 없다’가 그래서 내 그림 철학 중 하나가 됐다. 끝까지, 좀 쉬다 또 끝까지 그리다 보면 어설퍼도 또 하나의 그림이 된다. 정말 세상에 망친 그림은 없다. 세상에 망친 인생은 없듯 말이다.
-113쪽에서

 

어떤 이는 힘찬 빗줄기처럼 씩씩한 선을, 어떤 이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선을, 각자 수십 년 삭혀온 선을 풀어내 놓기 시작한다. 누군가 이야기했던 누에고치론이 딱 맞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은 누에고치라고. 모두 고치 속에 어마어마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고. 단지 풀어내지 않았을 뿐이라고. 풀어내기 시작하면 엉켜 있던 선들이 끊임없이 풀려 나올 것이라고. 각자 다른 모양의 선들이 말이다.
-108쪽에서

 

 세 번째 장 「그림이 우리를 그려주었네」에서는 그림으로부터 시작된 인연 이야기를 엮었다. 효자동 백 살 할머니 집부터 인왕산을 비롯 서촌 곳곳의 동네 친구들, 미술 선생님, 페이스북 친구들, 이효리, 구본준 기자에 얽힌 비화까지 각양각색 인연들이 하나같이 소중하고 정겹다.
 네 번째 장 「작은 돌멩이를 치우는 사람」에서는 사회적인 인간으로서 세상과 나누고픈 이야기들을 적었다. 1960년생인 저자는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며 이데올로기를 무겁게 짊어지고 살았고 시대와 국가를 고민하느라 개인의 욕망과 자유는 스스로 옭아맸던 세대로서 그러한 시대를 통과하며 내면화했던 자아상과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촛불 집회와 세월호 사건을 다시 겪으며 동시대인이자 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고민한다.


 

휘둘리는 삶 속에서 꼭 지켜내야 할 것들
펜화로 새긴 서촌의 풍경, 따뜻하고 정겨운 삶의 현장


 

저자는 오래된 것, 낡은 것, 해진 것 속에서 비어져 나오는 미덕을 상기하며 “합리적인 척, 이성적인 척, 논리적인 척, 세련된 척, 서구적인 척, 우리가 만나는 현재가 전부인 양 깔끔하고 심플한 현대 빌딩 모양인 척 우기며 살지만, 실상은 우리네 삶이란 빌딩과 적산가옥과, 빌라와, 판잣집과, 양옥과, 기와집이 뒤범벅인 뒤죽박죽 그런 모습”이며 “문풍지 사이로, 얽어놓은 기와 사이로, 여기저기 바람 숭숭 들고 비 새는 낡은 기와집” 같으며 “어려운 과거와의 복잡한 연결고리 속에 놓여 허우적대는 게 우리 삶”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 속에서 꼭 지켜야 할 것이 기와집으로 상징되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서촌의 과거와 현재를 부지런히 기록해가는 것도 그러한 정성의 이름일 터다.

 

건물은 역시 오래되어야 제맛이다. 아무리 멋없이 단순하게 지어진 건물이라도 세월이라는 켜를 입으면 멋을 더해간다.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의 건물들뿐 아니라 우리 동네 백 년 가까이 묵은 한옥들은 그려도 그려도 지루하지 않다. 기와 한 짝, 돌담 하나마다 퀴퀴한 사연들이 풍기는 맛이 깊다.
-98쪽에서

 

 가느다란 선과 점으로 이루어진 펜화로 “퀴퀴한 사연”의 현장을 날마다 세밀히 새겨가는 저자의 서촌 풍경들은 그래서 더 귀하다. 책에 실린 펜화 45점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휘둘리는 삶 속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이렇게 언제나 각자의 사연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들, 그리고 그러한 것들 틈바구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삶을 향해 돌진해가는 용기일 것이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일 수 있는 용기, 그것을 위해 자신이 현재 가진 가장 소중해 보이는 것들을 버릴 수 있는 용기.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날 수 있는 용기. 그 용기만을 나를, 세상을, 진정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165쪽에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 일을 위해 월급 없이 살아가는 법을 걸음마 배우듯 배워야 한다는 것. 그로 인한 가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그 가난이 죽을 때까지 계속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이 시대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는 ‘가난 앞에 당당하게, 의연하게, 행복하게 살기’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예전보다 조금 가난해졌지만, 조금 많이 행복해졌다”는 저자의 고백은 그래서 더 묵직한 여운을 준다. 
 『서촌 오후 4시』에 실린 <서촌옥상도> 연작을 비롯한 그림들은 2015년 2월 17일부터 3월 1일까지 갤러리 류가헌의 전시를 통해 원화로 만나볼 수 있다

 

추천사


옥상화가를 자처하는 김미경 씨는 아예 옥상을 자기 아틀리에로 삼았다. 맞다! 옥상에 올라가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시야가 트인다. 옥상에서는 호흡도 자유스러워지면서 마치 무당(예술가)이 된 느낌이다. 고흐 못지않게 끈질기게 가느다란 선을 그어대며 그는 현장에서 뛰어난 작가로 태어나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그가 옥상화가로 변신해가는 과정을 그림과 함께 실었다. 글과 그림이 맛깔나게 어울린다. 무엇보다 재미있다.
김정헌 화가,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혹자는 말할지 모른다. 그는 미술대학조차 나오지 않은 사람 아닌가? 화가는 졸업장이나 등단 코스로 그 자격을 얻는 사람이 아니다. 화가는 깨달은 사람이다. 자신이 화가인 줄 알고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으면 그 사람은 화가다. 화가는 더하고 곱하는 자가 아니라 빼고 나누는 자다. 김미경의 그림을 보라. 빼고 나누어 풍성하다. 선 하나하나가 순수하고 형태 하나하나가 정겹다. 공교함은 결코 순수함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서촌 오후 4시의 풍경이 참 담백하고 순수하다.
이주헌 미술평론가, 전 서울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