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자와 신이치, 오에 겐자부로, 이노우에 히사시 등에게 깊은 영향을 준
당대의 지성인 야마구치 마사오의 대표작

 

“방랑하는 학자wandering scholar, 앎의 지평을 개척한 거인”, 고故 야마구치 마사오의 대표작 『문화와 양의성』이 마음산책에서 출간되었다. 지난 2003년 『문화의 두 얼굴』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된 지 11년 만에 선보이는 개정판이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가 선정한 “동아시아 100권의 인문도서”(그중 일본도서는 26권)에 오른 것을 계기로, 마음산책이 용어와 표현, 문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세심히 고치고 다듬어 다시 펴냈다. “개정판이라고는 하나 거의 새로운 번역이라 불러도 좋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저자 야마구치 마사오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활동하기 시작한 ‘1960년대 일본’이라는 시대적․공간적 배경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당시 일본은 전쟁의 상흔 위에서 미군정을 거쳐 경제적으로는 고도의 성장을 이뤘지만 정신적으로는 공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에 갇혀 있었다. 전공투로 대표되는 일본의 학생운동이 그러했고, 아사마 산장 사건 같은 극단적인 상황도 불거졌다. 학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념과 당위가 난무하는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학문다운 학문이 빛을 발하지 못하던 시절, 야마구치 마사오의 등장은 그 자체로 커다란 파문이었다. 일본의 사상가 하야시 다쓰오林達夫는 야마구치 마사오를 가리켜 “반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라 평하기도 했으며, 오에 겐자부로와 나카자와 신이치, 이노우에 히사시 등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천재는 좀처럼 쉽게 탄생하지 않는 법이다. 야마구치 마사오는 본래 도쿄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했지만 뜻한 바와 달리 대학원에 진학해 역사 공부를 이어갈 수 없게 된다. 방향을 틀어 도쿄도립대학 대학원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 학계에 ‘안착’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고, 결국 생계를 위해 수년간 직업 서평가로 살기 시작한다. 서평을 쓸 때는 해당 도서를 공짜로 받을 수 있으니 책값이라도 아낄 요량이었던 것이다. 먹고사는 일이 주요한 목적이었으므로 분야를 가리지 않으며 책을 읽고 서평을 썼다. 들여다본 적이 없는 생소한 분야의 책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았다. 쓰기 위해 읽고 공부하고 다시 쓰는 일상을 반복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받은 고료의 태반은 또 책을 사는 데에 쓰였다. 편집자와 저자의 관계로 출발해 야마구치 마사오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까이 지낸 오쓰카 노부카즈(전 이와나미쇼텐岩波書店 대표)에 따르면, 그 수년간의 고생을 토대로 훗날의 야마구치 마사오가 탄생한 셈이다. 어느 한 분야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서 학문과 학문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자신만의 이론을 펼친 당대의 지성인, 야마구치 마사오 말이다. 그런 그의 대표작이 바로 『문화와 양의성』이다.

 

 

신화 분석에서 출발해 기호학과 현상학, 인류학을 가로지르는
문화의 원리와 본질, ‘중심’과 ‘주변’

 

총 7장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고풍토기’라 불리는, 8세기경 편찬된 일본의 풍토기를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화를 구성하는 “질서와 혼돈의 역동적인 관계가 어떠한 이미지를 통해 파악되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풍토기를 단서로 하는 편이 의심할 여지 없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야마구치는 ‘야토신’ ‘쓰치구모’ ‘포악한 신’ 등 일본 고대 문화 속에 존재한 혼돈, 즉 주변의 아이콘들을 발굴하고, 이들 덕분에 문화의 질서 그리고 중심이 더욱 정연해짐을 보여준다. 혼돈과 질서, 주변과 중심이 대對를 이루어 문화를 구성한다는, 이 책의 핵심이 드러나는 첫 번째 지점이다.
일본 고대 신화에 이어서는 전 세계에 두루 걸친 현상이라 할 수 있는 ‘신’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신과 신이 표상하는 근원 개념 또한 대의 구조로 파악해야” 한다는 클레망스 랑누의 논의를 소개․분석한 후, 이 “마이너스 상징의 신화론적 분석”이 케네스 버크의 기호학적 관점을 통해 어떻게 보편 문법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 여러 이론과 사례를 들어 제시한다.

 

버크는 역사적 맥락에 구애받으면서도 패러다임 추출을 목표로 하는 폰텐로즈의 방법을 주목한다. (…)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 언어학에서 구조주의, 최근에는 토머스 쿤의 “패러다임으로서의 과학”이라는 정의에 사용되는 등 비교적 수요가 많아지고 있는 단어다. 버크는 이 용어를 자신의 입장에서 “발단, 과정, 종결과 같은 부분을 포함하는 진행 형태에서 나타나는 신화의 구조 원리”라는 규정을 토대로 하여 사용했다. 그는 이러한 패러다임 안에 포함되는 모티프 연구는 시학詩學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시학이란, 형태의 문법이라는 의미에서 논리학이기도 하다.
50~51쪽에서

 

계속해서 야마구치는, 폴 리쾨르와 에드문트 후설, 니콜라이 트루베츠코이, 지그문트 바우만 등의 이론을 넘나들며 이와 같은 ‘대의 구조’가 문화 속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발현되는지 기호학을 통해 분석한다. 그런 다음 일본 민속에서 나타나는 혼란(〓혼돈)의 요소들을 살펴 “민속적 사실을 혼돈과 질서의 변증법적 상관관계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야마구치의 관점은 에른스트 카시러와 에드몽 오르티그 등의 논의를 빌려 더욱 풍성해진다. 이 지점에서 ‘이인異人’이 등장하는데, 이인은 질서와 혼돈, 중심과 주변처럼 우리와 대를 이루는 존재이자 우리의 일부다.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 필요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유용한 그들은 중세 서구의 유대인이기도 하고, 많은 사회에서 여성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현상학적 전망으로 재구축한 알프레드 슈츠는 이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상 파괴자, 신성 모독자 또는 공동체의 구성원 중 단 한 사람에게라도 서로 이해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정당한 기회를 주는 데 충분한 일관성, 명증성, 통일성이라는 외관을 보증하는 ‘상대적·자연적 세계관’을 계속해서 붕괴시키는 자, 공동체 내의 구성원이 의문을 품지 않는 거의 모든 것에 의문을 품는 자.
106쪽에서

 

야마구치는 그가 조사한 나이지리아 주쿤족의 사례를 들어 ‘이인’의 범주에 속한 여성의 담론을 추적한다. 주쿤 사회에서 여성은 “잠재적으로 더럽혀진 존재”인데, “이 사회는 어떤 의미에서 여성을 안쪽의 ‘그들’로 설정함으로써 성립한다고 할 수 있”으며 질서 또한 여성을 빌려 뿌리 내린다. 문화의 프락시스(무의식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규정하는 요인)가 형성․유지되는 양상을 드러내 보인 것이다.

 

문화의 프락시스는 ‘주변’에 대한 ‘질서’의 작용에 의한 커뮤니케이션(교감)으로 보증되고 있다. 이러한 기호 차원에서의 주변의 강조가 ‘희생자의 조작’이라는 행위를 통해 ‘질서’와 ‘혼돈’의 변증법 형성에 가장 역동적인 형태로 작용함을 분명히 한 것은 케네스 버크였다. 버크는 모든 반질서적 마이너스 기호가 붙은 ‘희생자’와의 거리에서 문화는 ‘질서’를 형성한다는 문화 프락시스의 근본 원리를 명확히 한다.
144쪽에서

 

문화의 프락시스는 ‘배제의 원칙’을 토대로 한다. 무엇 또는 누구를 희생양으로 삼아 배제하는 과정에서 ‘중심’과 ‘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인데, 야마구치는 토머스 사스와 쥘 미슐레의 논의를 근거로 제시한다. 그 과정에서 촉매제 역할을 하는 것이 ‘마법사’ ‘트릭스터’인 바, 이들은 중심과 주변, 질서와 혼돈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양쪽을 자유롭게 오가는 가운데 문화의 함의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양의적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야마구치는 다섯 번째 장에 이르러 다시금 알프레드 슈츠를 빌려 일상생활 그리고 현실 세계가 지닌 여러 층위를 현상학적으로 분석하고, ‘토픽’과 ‘타당성’이라는 슈츠의 개념을 추출한다. 이를 통해 문화가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음을 밝힌 후 피터 버거와 토마스 루크만, 엔조 파치, 에드먼드 리치 등을 통해 우주의 상징성과 현실의 주변성을 논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다다른 곳은 1930년대 러시아 형식주의와 프라하학파다. 그들이 제기한 시적 언어의 문제야말로 “주변성의 문제를 보다 체계적이고도 다각적인 언어의 차원에서 추구”한 것이었다. 나아가 “언어뿐 아니라 현실의 역동성을 파악하는 데도 매우 유효한 관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더욱 유의미하다. 야마구치는 유리 티냐노프, 얀 무카르좁스키, 로만 야콥슨 등에게서 “시적 언어가 본질적으로 일상 언어에 대한 부정성 위에 성립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프라하 구조 이론의 ‘생기 불어넣기’ 사고는, 이러한 전환에 대한 명확한 제언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책에서 추구해온 문화를, 오늘날 이해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다양한 시점, 즉 기호학에서는 ‘꼬리표 달기’의 문제, 현상학에서는 ‘생활 세계’와 ‘주변성’의 문제, 현실의 다원성의 문제, 변증법적 전개의 문제, 심층 심리의 문제 등과 여러 지점에서 교착한다. 나아가 문화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자유에 대해 고찰하기 위한 방법론적 전제를 제공한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주제에 의해 무장된 유연한 지적 감수성이라 할 수 있겠다.
281쪽에서

 

신화 분석에서 출발해 언어학과 현상학, 기호학, 민속학과 인류학 등을 종횡무진하며 숨 가쁘게 펼치는 야마구치 마사오의 주장은, 어쩌면 저 한 문장으로 요약 가능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주제에 의해 무장된 유연한 지적 감수성”이라고 말이다.

 

 

기존 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트릭스터형 지식인’,
야마구치 마사오가 안내하는 드넓은 앎의 세계

 

야마구치 마사오는 일본의 인류학자이면서 문화기호학자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는 그를 온전히 정의할 수 없다. 이 책 또한 “읽기에 만만한 책이 아니다. 우선 저자의 주 전공인 인류학의 시각을 뛰어넘는 인문, 사회과학의 다양한 이론의 폭포수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 또한 ‘문화’를 구성하는 원리와 조건을 제시하기 위해 드는 예제가 일본과 전 세계의 신화, 설화, 문학을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특정 또는 단일한 학문 영역 내에서 주장을 전개하는 것이 아닌, 실로 다양한 학문과 이론, 이론가들 사이를 오가며 문화의 본질을 파헤치는 야마구치 마사오. 그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트릭스터’야말로 그 자신에게 가장 걸맞은 호칭일 것이다.
2013년 봄, 야마구치 마사오가 타계한 후 여러 매체에서 그의 생애와 지적 세계에 관해 비중 있게 다루었다. 그중 하나인 <슈칸도쿠쇼진>에서는, 앞서 이야기한 오쓰카 노부카즈와 문화인류학자 이마후쿠 류타의 심도 깊은 대담을 “야마구치 마사오가 남긴 것”이라는 제목으로 여러 면에 걸쳐 실었다.(이마후쿠 류타는 현재 일본 내에서 야마구치 마사오를 학문적․정신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된다.) 야마구치 마사오 그리고 그의 정신을 한국 독자에게 전하고자 『문화와 양의성』 개정판에 <슈칸도쿠쇼진>의 대담을 발췌 번역하여 실었다. 이를 통해 “야마구치 마사오가 지향한 ‘지知의 형태’”를 더욱 뚜렷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대담 속에서 오쓰카와 이마후쿠는 야마구치 마사오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한다.

 

야마구치 마사오라는 지성이 실로 매력적이었던 까닭은, ‘중심과 주변’ ‘트릭스터’ ‘희생양’ 등 야마구치 씨가 훗날 제시하게 되는 이론 이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자 지식인으로서 지니고 있는 스탠스와 포지션, 스타일이 현재 학문 또는 지식 담론이 생겨나는 관습적인 장을 초월했다는 점에 있는 것 같아요. (…) 지식인이나 대학이라는 장이 학學 그리고 지식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까지 급진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없었습니다.
290~291쪽에서

 

야마구치 씨는 인류학자라는 모습을 몸에 걸치고서 여러 형태로 필드워크를 했었지요. 필드워크의 대상은 책일 때도 있었고 고서점이기도 했는가 하면 세계의 지식인이기도 했습니다. 국가나 민족을 초월해서 지식인으로서 공통의 대화를 나눔으로써 지식의 필드워크를 실천해왔어요. 제가 야마구치 씨와 함께한 <헤르메스>에서만 해도 세계의 대표적 지식인과 50명 정도, 존 케이지John Milton Cage Jr.나 피터 브룩Peter Stephen PaulBrook 같은 유명인부터 무명의 젊은이까지 대담을 나누었습니다. 이런 지식인은 일본에 없어요.
297쪽에서

 

『문화와 양의성』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현실 세계, 나아가 상상과 상징의 세계 또한 지배하는 ‘문화’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책이다. 이를 위해 야마구치는 신화학을 비롯해 기호학, 현상학, 인류학, 언어학 등 인문․사회과학의 제 영역을 가로지르며 그가 소화해온 수많은 학자와 그들의 이론을 막힘없이 펼쳐낸다. 어쩌면 『문화와 양의성』을 통해 우리가 진정 접할 수 있는 것은,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평생에 걸쳐 ‘앎’의 길을 추구한 어느 지성인의 치열한 기록일지 모른다.

 

 

추천의 글 (2000년 이와나미문고본 발간 해설 중에서)

 

존재 자체가 실로 매력적인 야마구치 마사오의 지성은, 다양한 영역에서 시대의 풍경을 새로 그리고 있었다. 그는 당시 눈이 부실 만큼의 박식함과 듣는 이를 불문곡직하게 만드는 힘으로, 일본의 지적 세계를 지배하던 순수주의의 중력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다. 신화의 세계에서, 오페라 무대 위에서, 지방 신사의 가구라덴神楽殿과 소설, 그림에서 다양한 이미지를 잇달아 끌어냈다. 인류학자이면서도 1930년대 유럽의 사상과 예술의 창조를 둘러싼 탐구, 그리고 러시아혁명 초기 들끓어 오르는 시대의 창조자들에 대한 연구 등에 몰두한,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종류의 인간이 나타난 것이다.
이 책이 쓰인 1975년. 우리는 이와 같은 지성의 출현을 마음속 깊이 바라고 있었다.

나카자와 신이치 中沢新一 종교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