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재발 이후 새롭게 마주한 삶
『사는 게 뭐라고』 작가의 외침 “훌륭하게 죽고 싶다”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는 게 뭐라고』의 작가 사노 요코.  삶에 관한 시크함을 보여준 그녀가 암 재발 이후 세상을 뜨기 두 해 전까지의 기록을 남겼다. 『죽는 게 뭐라고』는 사노 요코가 “돈과 목숨을 아끼지 말거라”라는 신념을 지키며 죽음을 당연한 수순이자 삶의 일부로 겸허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이루는 산문들과 대담, 작가 세키카와 나쓰오의 회고록에도 이러한 태도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노 요코는 시종일관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초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누가 죽든 세계는 곤란해지지 않아요.
 그러니 죽는다는 것에 대해 그렇게 요란스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내가 죽으면 내 세계도 죽겠지만, 우주가 소멸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게 소란 피우지 말았으면 해요.
 -119쪽


신경과 클리닉 이사장 히라이 다쓰오는 이런 태도가 “작가라는 직업 때문인지 ‘인생이란, 나 자신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등에 대해 스스로 잘 정리해둔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했던 사노 요코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으니 바로 통증이다.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아픈 건 싫다.
 아픈 건 무섭다.
 멍해진 머리로 침을 흘려도 상관없으니 아픈 것만은 피하고 싶다.
 -72쪽


결국 그녀는 비싼 돈을 지불하고 호스피스에 들어가기도 한다. 그곳에서 자신처럼 세상사와 고통을 피해 도망 온 사람, 하루가 다르게 죽음을 향해 미끄러져가는 사람, 그들의 가족을 만난다. 이 책에서 작가는 전작 『사는 게 뭐라고』와 다르게 자기 자신과 지인의 사적 관계를 넘어 생면부지의 타자들과 만나고 그들의 소멸도 가까이에서 지켜보게 된다.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의 작은 우주에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그 감정은 소중한 물건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 쓸쓸함이었다.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나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
 이제는 결코 투명한 모습으로 고요히 내 앞을 스쳐 갈 일이 없어진 것이다.
 -152~153쪽


호스피스에 입원한 사노 요코는 다소 객관적인 거리에서 죽음을 관찰하게 된다. 그건 너무 멀지도 비통에 젖을 만큼 가깝지도 않은 이(2.5인칭)의 시선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투정을 부리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게 된다. 다만 쓸쓸함을 느낀다. 이 순간 우리는  “훌륭하게 죽고 싶다”는 사노 요코의 개인적인 바람이 보편적인 죽음 준비교육의 일환으로 확장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작가가 자신이 아닌 타자의 소멸에 애틋한 마음을 술회하는 모습에서, 사람은 역시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인간성을 회복한다는 깨달음도 얻게 된다.



신랄하고 박력 있는 목소리
생의 끝자락에서 한껏 예리해진 투덜거림


전작과 마찬가지로『죽는 게 뭐라고』에서도 사노 요코 특유의 명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 역시 가장 소중한 건 돈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40쪽)
인간에게 언어란 매우 중요하다. 언어만이 인간을 증명한다고도 할 수 있다.(50쪽)
사람은 제각각이다. 그렇다, 사람은 제각각이다.(55쪽)
내가 생각하기로 사람은 집에서 죽어야 한다.(70쪽)
자연은 그 어떤 경우에도 실패해서 찢어버리고 싶은 그림처럼 되는 법이 없다.(151쪽)
묻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알게 된다.(174쪽)


생의 끝자락에서 선 작가에게는 단조로운 일상조차 낯선 이미지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이 책에서 사노 요코는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대화나 사소한 현상에 대해서도 예리한 사유를 발휘한다. 그것은 자신의 처지에 얽힌 불만이나 신경질일 때가 많지만 우리가 무감하게 받아들이던 삶의 의문들과 얽혀 있기도 하다. 그래서 사노 요코의 투덜거림은 더 이상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일상성에 파묻힌 모순을 들추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동물들은 고독을 견디는 강인하고도 적막한 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동물은 고독한 눈을 잃어버렸다.
그런 눈은 온갖 욕망을 표현하는 도구로 전락하여 탐욕스럽게 번들거린다.
우리 인간은 숙명적으로 그렇게 변해버렸다.
-50쪽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다


사노 요코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익숙했다. 그녀는 세 살일 때 태어난 지 33일 된 남동생이 쌍코피를 흘리며 죽는 걸 목격했고, 여덟 살에는 아들처럼 보살피던 네 살 난 동생이 주인 없는 무덤에 묻히는 것을 무덤덤하게 지켜보았다.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다. 이듬해 일심동체와 같던 오빠가 죽어버렸을 때에야 사노 요코는 처음으로 죽음을 실감하며 울었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큰 상실감”을 느꼈다. 이후 그녀는 “분할 때만 우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또한 “죽을 때까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린 시절에 목격한 죽음들이 남아 있는 삶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게 만든 것이다. 그런 사노 요코가 더는 피할 수 없게 된 제 몫의 죽음 앞에서 새삼 발견하게 된 풍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가 죽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잡초가 자라고
작은 꽃이 피며 비가 오고 태양이 빛날 것이다.
갓난아기가 태어나고 양로원에서 아흔넷의 미라 같은 노인이 죽는 매일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죽고 싶다.
똥에 진흙을 섞은 듯 거무죽죽하고 독충 같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
-157쪽


사람은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다.
-175쪽


이 책에서 사노 요코는 결코 살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다. 자족적으로 삶을 반추하거나 아쉬움 없이 살라고 함부로 충고하지도 않는다. 죽을 때까지는 살아 있으므로 그저 남은 동안 제대로 살고(죽고) 싶다고 말한다. 이 예의바른 초연함. 암이라는 고통으로 앎을 얻은 이의 너그러운 포용. 이처럼 『죽는 게 뭐라고』에서 사노 요코는 자신이 느낀 삶에 대한 경의를 가감 없이 토로한다.



추천사


사람은 삶이 되고 암은 앎이 된다


이 책의 일본어 원제가 ‘죽을 의욕 가득’이라는 걸 알고 나서 문득,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침묵의 수도’로 유명한 트리피스수도원에서 단 한 가지 허용되는 말은 “형제여, 우리가 죽음을 기억합시다”라는 말이다. 왜일까? 지금 문화에서 죽음은 늘 닥치거나 선고되거나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암 선고를 받은 후 사노 요코가 줄기차게 말하는 죽음은 도리 없이 동전의 양면처럼 삶을 증언하고 있다. 극렬한 통증이 살아 있음의 증거인 것처럼 죽을 의욕 역시 삶의 가장 강렬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21세기에 가장 유명한 암 환자였던 스티브 잡스가 죽음을 “삶의 최고의 발명품”이라 말한 아이러니는 이렇게 이해해야 마땅하다. ‘사람’을 빠르게 치려다 오타가 생기면 종종 ‘삶’이 된다는 걸 아시는지. 이 책은 암에 걸렸지만 담배 따위 끊지 않고,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죽고 싶어 하던 박력 있는 할머니가 ‘암’에 대해 적어 내려가다가 문득 ‘앎’에 이르게 된 사려 깊은 오타 같다.


백영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