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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1455 조회수 1329 작성일 2010년03월26일 11:03
이름 함정임 작성위치 118.33.114.49
제 목   가족, 삶 뒤에 숨은 사랑
첨 부
함정임 선생님의 서평을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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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삶 뒤에 숨은 사랑

함정임│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 etrelajiham@empal.com│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마음산책, 416쪽, 1만3000원

비행기는 태양이 이동하는 방향을 따라갔다.
베를린행 루프트한자가 이륙한 지 대여섯 시간 흘렀을까.
나는 이륙 직후부터 꺼내 읽던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그저 좋은 사람>을
잠시 무릎 위에 내려놓고, 기내 스크린의 에어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는 빨간 꼬리를 늘이며 중국 대륙을 거쳐
유라시아로 진입하고 있었다.
떠나온 서울은 어둠에 싸여 있었고,
지금 앉아 있는 1만m 상공에서 일직선 아래에 위치한 인도는 태양빛이 가득했다.

나는 긴 역삼각형의 대륙을 둘러싸고 있는 지명들을 눈으로 읽었다.
뭄바이, 캘커타, 벵골만…. 질병인 멀미증이 간간이 일었다.
스크린의 인도 대륙을 응시하며 무릎 위의 소설책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그저 좋은 사람>에 수록된 단편 ‘길들지 않은 땅’의 주인공 루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낯선 미국에 와 살면서
친족이 있는 인도를 다녀오곤 하면서 시달렸을 이방인의 멀미증을
살며시 눈을 감고 가늠해보았다.
그리고 가장이라는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살았던 인도 출신의 사내,
그녀의 아버지가 느꼈을 이방인의 긴장감과 서글픔도 헤아려보았다.


어떻게 가건 인도로 가는 길은 언제나 대장정이었다.
갈 때마다 느꼈던 스트레스가 아직 생생했다.
그 많은 짐을 싸서 공항으로 옮기고 서류를 빠짐없이 챙겨 몇 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으로
가족을 안전하게 이동시켜야 했다.
하지만 이 여행은 아내에겐 삶의 전부였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그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래서 그들은 돈이 들어도, 아이들이 커가면서 싫어해도,
갈 때마다 슬프고 수치스러워도 인도에 갔다. - ‘길들지 않은 땅’에서


‘길들지 않은 땅’의 주인공 루마는 서른여덟 살의 인도계 여자다.
그녀의 부모는 인도 벵골 출신으로 자식들의 더 나은 미래와 환경을 위해
고국을 떠난 이민자다.
그녀는 부모가 미국 북동부 뉴잉글랜드주에 정착하기 전 몇 년 동안 머물렀던 런던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두 살 때 그녀의 부모는 미국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남동생을 낳았고,
미합중국의 다국적 이민자들 중 인도계의 일원이 된다.
한국의 이민 부모들이 그렇듯이 그들은 남매의 교육에 헌신적이고,
남매 또한 부모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자기가 가진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려고 애쓰며 성장한다.


인도계 벵골인 2세로 살아가기

루마는 아이비리그 입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성실한 모범생으로 자라고,
아들 로미는 프린스턴대학에 입학해 부모의 자랑이 되지만 졸업 후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보다는
영화판에 들어가 세계를 떠돌아다닌다.
루마는 미국의 교육을 받으면서 인도에서 나고 자란 부모의 눈이 되어주고, 발이 되어준다.
남동생 로미는 누이보다 수재지만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의무감에서 벗어나
미국식으로 자유롭게 살고, 어쩔 수 없이 누이는 부모님에 대한 부채 의식을 껴안고 살아간다.
여기까지가 <그저 좋은 사람>에 수록된 ‘길들지 않은 땅’의 기본 줄거리다.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이 네 사람,
인도 캘커타 출신인 부모와 런던(‘그저 좋은 사람’), 또는 베를린(‘지옥-천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 미국 뉴잉글랜드로 건너왔다는 딸 루마(또는 수드하),
그리고 미국에서 낳은 아들 로미(또는 라훌).
이 네 명의 인물 중에 딸은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단편들에서 다른 이름의 인물들로 등장한다. ‘길들지 않은 땅’의 루마,
‘그저 좋은 사람’의 수드하,‘아무도 모르는 일’의 생, ‘뭍에 오르다’의 헤마 등이 그들이다.
이 딸들, 그러니까 소설의 여성 화자들은 뉴잉글랜드와 런던, 로마와 시애틀, 뉴욕 브루클린 등으로
무대를 옮겨가며 인도 벵골인 2세로 살면서 치러야 했던 부모 세대 삶의 내력과
새로운 정착지 삶의 풍경들을 세밀하고도 차분한 언어로 그려 보인다.

웨일랜드는 충격이었다.
갑자기 미국의 교외에 갇혀 평생 외국인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에 부딪힌 것이다. (중략)
웨일랜드에서 그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뉴잉글랜드 지방(미국 북동부 지방을 일컫는 말로
코네티컷, 로드아일랜드, 뉴햄프셔, 매사추세츠, 버몬트, 메인 주 등이 포함)의
작은 마을의 관습에 따라 살았다.
그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둘을 조화시키며 사는 것보다 헷갈리는 일이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특히 수드하에게 의지했다.
아빠에게 긁어모은 낙엽을 집 건너편 숲 앞에 두지 말고 비닐 백에 담아두라고 설명한 것도 수드하였다.
그녀는 완벽한 영어로 리치미어의 A/S 센터에 전화를 걸어 가정용품을 수리받았다.
라훌은 그런 식으로 부모님을 돕는 건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드하가 부모님이 인도에서 떠나와 사는 것을 기복이 심한 암 같은 병 같다고 생각한 반면,
라훌은 부모님 삶의 그런 측면에 냉담했다.
“누가 끌고 온 것도 아니잖아.”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빠는 부자가 되려고 인도를 떠났고, 엄마는 다른 할 일이 없었으니까 아빠와 결혼했고.”
가족들의 약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었던 라훌은
수드하가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실조차 조금도 덮어두지 않았다. - ‘그저 좋은 사람’에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삶의 사실들

줌파 라히리는 인도계 벵골인 2세 작가다.
그녀 소설의 지향점은 한결같이 우리가 살면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삶의 사실들’에 있다.
그녀가 소설에서 그려 보여주는 인생들을 만나다보면,
미국에 정착한 한인 친척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는 2, 3년에 한 번 뉴욕에 갈 때면 허드슨 강 건너 주택가에 있는 친척집에
얼마간 머물곤 하는데, 중·고등학생 때 그곳으로 떠난 조카들은 이제 성장해
대학을 나와 직업을 가지고 있거나 대학원에 진학해 있고,
그만큼 그들의 삶은 안정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그런데 하루 이틀 그들의 삶에 끼어 살다보면,
어느 순간 집안에 깊숙이 스며 있는 알 수 없는 고적함과 대면하게 된다.
그것은 때로 고독이 되기도 하고 외로움이 되기도 하고 서글픔이 되기도 하고
그리움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복잡 미묘한 정서들은 자식들의 것이 아닌 그들 부모의 것이다.
두 대륙의 두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고,
두 나라의 대중문화 코드를 습득하고,
두 나라의 정체성과 현실감을 잃지 않기 위해 긴장하고 살아야 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나는,
그들의 행복과 안정에도 불구하고, 때로 형언할 수 없는 연민에 사로잡히곤 한다.

자식들이 그 사회에 뿌리내리기까지 헌신해야 했던 책임감과 피로감,
나름대로 성공했다는 자부심과 안도감,
나고 자란 곳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그리움.
<그저 좋은 사람>에 수록된 ‘길들지 않은 땅’의 딸(장녀)과 아버지(가장) 사이에는
이러한 복합적인 정서가 장벽으로 작용하며
그로 인해 둘은 경직된 관계로 살아왔다.
줌파 라히리 식 가족 서사의 힘은 바로 이 지점을 정곡으로 꿰뚫어 풀어가는 데 있고,
거기에서 독자가 체험하는 울림은 압권이다.

작품을 잠시 들여다보면, 뉴잉글랜드에서도 평생 인도 여자로 살았던 루마의 어머니가
뜻하지 않게 갑자기 죽고,
평생 이민 가장으로 두 어깨에 책임을 짊어지고 살았던 아버지는
다니던 회사에서 은퇴한 후 삶을 정리해 작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연금으로 세계 여행을 하는 것을 낙으로 살아가게 되면서 여행지에서 만난
노년의 벵골 여자와 친구와도 같은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맺는다.
딸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할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는 딸의 새로 이사한 시애틀 집을 방문하게 되고,
일주일을 함께 보내면서 오랜 세월 부녀간에 응어리져 있던 부채 의식을 풀어간다.

더 나은 삶, 그저 좋은 사람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일까.
줌파 라히리는 ‘그저 좋은 사람’의 가족 이야기들을 통해
잔잔하면서도 명징한 문체로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아버지가 샤워하는 동안 루마는 차를 준비했다.
차를 마시는 건 루마가 좋아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어도 낮이 저녁으로 바뀌고 있다는 걸
형식을 갖춰 인정하는 거라 할 수 있었다.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시간도 대충 보내기 마련인데,
아버지와 함께 베란다에서 차와 캐슈넛과 나이스 비스킷을 먹을 수 있으니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호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들리는, 거대한 산들바람이 나무를 스치는 소리가 좋았다.
아카시가 아기였을 때 깊이 잠들면 내던,
만족스런 한숨소리를 확성한 것 같았다.
나뭇잎은 마치 나무 속에서 나오는 빛을 받아 빛나고,
차갑지 않은 공기 속에서 떨고 있는 듯했다. - ‘길들지 않은 땅’에서


<신동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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