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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1314 조회수 1449 작성일 2009년08월19일 08:08
이름 권한라 작성위치 118.33.114.49
제 목   왕성한 식탐, 위대한 지식
첨 부

한 가지 고백하자. 나는 사실 식탐이 엄청난 사람이다. 삼시 세끼를 꼬박 챙겨 먹을뿐더러 끼니 사이사이 간식거리를 고민하는 걸 크나큰 낙으로 여긴다. 한국 사회에서 임산부의 식욕 외에 여성의 식욕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니, 내 식탐도 과히 자랑할 바는 아니지만 굳이 숨기지도 않는다.(숨길 수 없는 거겠지만.)

서론이 길었다. 이 책 『미식견문록』을 만들면서 가장 기뻤던 것은 엉뚱하게도 식탐을 긍정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었다. 이 책의 저자인 요네하라 마리는 내 식탐은 갖다 대지도 못할 정도로 엄청난 대식가다(오죽하면 코스 요리를 먹으러 갔는데 하도 빨리 먹어 같은 음식을 두 번이나 내왔을까). 하지만 그녀의 식탐이 빛나는 것은 단지 빨리 많이 먹었다는 데 있지 않다. 요네하라 마리의 매력은 음식을 먹는 와중에도 ‘인문 정신’을 발동시킨다는 데 있다. 그러니까 저자는 자신이 먹어본 음식은 반드시 그 기원과 문화적 배경에 대해 찾아보고 자신만의 유머러스한 언어로 정리한다. 그 지식은 식습관, 새로운 식품의 등장, 음식을 둘러싼 종교적 금기나 계급 차이, 문명 간 교류까지 방대한 내용을 포괄한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 먹어본 ‘할바’라는 러시아의 과자 맛을 몇십 년째 잊지 못해(이 집요함이란!) ‘할바’와 비슷해 보이는 우즈베키스탄의 과자 ‘할바인타르’, 루마니아의 ‘Loukoum’, 스페인의 폴보론 등의 조리법과 어원을 추적하여 ‘할바의 모든 것’을 밝혀내는 식이다. 마리 여사는 이 과정 끝에 이들이 모두 ‘유라시아 대륙에서 유목민이나 상인들의 교류에 의해 전파된 혈연관계에 있는 음식들’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또 사과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성서 속의 사과, 신화 속의 사과, 희곡 속의 사과 등을 조사하여, 인류가 사과에 어떤 이야기와 의미를 담아왔는지 살피기도 한다. 사과 파이를 먹을까 사과 주스를 먹을까만 고민하는 나와는 차원이 다른 식탐이다.

나는 그녀가 이토록 일상적인 음식이라는 소재로 시작해서 역사 깊숙이 훑을 수 있다는 것에 조금 감동했다. 왕성한 식탐을 위대한 지식과 연결하는 센스 만점 인문주의자, 요네하라 마리!

여기에 곁다리로 들어간 본인과 가족의 식생활에 대한 내력은 배꼽을 잡게 한다. 미식가였던 삼촌의 마지막 유언은 저녁 메뉴에 관한 것이었다거나, 라식 수술 뒤 일시적 실명 상태가 된 일본 환자에게 우메보시 도시락을 먹여 눈을 밝혀주었다거나…… 음식에 관한 사연들은 끊임없이 솟아난다. 이쯤 되면 음식은 가장 강력한 추억의 촉매제라 할 만하지 않은지. 음식으로 사람과 시대를 맛깔나게 풀어낸 이 책을 보며 생각한다. ‘그래, 내 식탐도 언젠가는 쓸모 있을 거야!’

<기획회의> 2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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